진언의 산실-진여심인당

밀교신문   
입력 : 202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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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충렬의 고장 의성 비안면에 건립된 심인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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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자료를 살펴보면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난 진기 15년(1961)도에도 심인당 신·개축이 활발히 진행됐으며 종단 내부의 정체성 확립과 외향을 넓히기 위한 일들을 전개했다. 
 
안강심인당(신혜·5월 11일)을 신축하고, 전주심인당(항수·1월 8일)과 동인심인당(승원·5월 3일), 남산심인당(희락·5월 15일), 온천심인당(5월 20일·폐쇄), 삼신심인당(항자·10월 20일)을 개축했다. 또한 이 시기 남산심인당의 해인을 육자진언 중심으로 배치했다(1월 11일). 이것은 육자진언을 비로자나 진언으로 하는 수행법을 확실히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리고 심인당에 결계법(심인당과 사택을 담장으로써 엄격히 구분하고 통로를 별개로 하는 것)을 실시했다(10월 15일). 이것은 심인당을 청정 도량으로 하기 위한 조치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5.16 군사 정변으로 인해 종립 심인중·고등학교는 시련을 겪었다. 당시 종단에서는 희락심인당에서 수행 중인 수창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최헌양(호석) 교무주임을 심인고등학교 교감 겸 교장서리로 임명했으나 혁명 정부에서 과거 4.19 직후 교직원 노동조합에 가담한 전력을 문제 삼아 대구형무소에 가두는 일이 발생했다(5월 31일). 이후 대종사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됐으나 혁명 정부는 최 교장의 재임을 반대해 결국 교직에서 물러났다. 또한 병역 미필자라는 죄명으로 심인중·고등학교 교사 5명을 해임하는 일도 일어났다(6월 17일). 이후 대종사는 학교가 안정을 찾자 10월 14일 심인중·고등학교에 심학시간을 편성했다. 회당 대종사와 손대련 스승(총지종 창종)이 매주 수요일 전교생에게 1시간씩 심학 과목은 직접 가르쳤다. 심인고등학교는 12월 15일 운영에 힘에 부쳐 잠정 폐교되었으며, 진기 26(1972)년 11월 29일 문교부로부터 재인가를 받아 오늘 대구 지역의 중추적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5.16 군사 정변으로 종교단체의 정상적인 활동에도 지장을 초래했다. 당시 혁명 세력은 종교단체들에 혁명과업 완수를 위해 4대 문교정책 지지 및 협조와 실천을 약속하는 결의문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전달하고 실천지도 사항을 문교부장관에게 보고하도록 했다(6월 17일). 그리고 정부의 8월 10일 0시를 기해 자오선을 변경했다. 8월 9일보다 30분 빠른 삶이 시작됐다. 이로 인해 종단에서도 불사 시간표를 개정했다(9월 1일). 이때를 기점으로 우리나라는 표준시간을 규정하는 표준자오선을 동경 127도 30분에서 135도로 변경했다.
 
표준 자오선 변경으로 우리나라는 그리니치 표준시보다 9시간 빨라졌고, 동경 135도 자오선이 지나는 일본과 표준시가 일치하게 됐다.
 
이밖에 종단에서는 교도의 불사를 스승이 기록하여 발표하는 인도기를 서울 밀각심인당, 희락심인당에서 시험적으로 실시하고(8월 29일), 교통이 불편한 농어촌 심인당에 수시로 순회하기 위해 차를 구매했다(11월 2일). 또 스승의 지권시간을 매일 3시간, 자성일은 3시간 30분으로, 공식시간은 매회 10분씩 지권으로 하며 사분정진은 매일 4시간 30분으로 개정했다(11월 2일). ‘심인불교 금강회 해인행’ 출판사명을 ‘순정출판사’로 등록했다(12월 28일).
 
이번 호에는 진기 15년에 개설된 비안심인당(진여·10월 20일)을 살펴보고자 한다.
 
진여심인당(경북 의성군 비안면 만세길 499-2)이 위치한 의성군 비안면은 군 소재지인 의성읍으로부터 서쪽으로 24.1㎞ 떨어진 전형적인 농촌으로 형성된 군 서부 지역의 관문이다.
 
의성군 자료에 따르면 위천과 쌍계천이 합수되어 북서쪽으로 흐르면서 광활한 평야를 열어 가면서 남북으로 면 전체를 양분하였고 국도 28호선이 강줄기를 따라 연해 관통해 가며 소재지에서 군위 소보간(15호), 쌍계리에서 안계 안정간(14호) 군도로가 내륙을 연결하는 간선 도로다. 면의 동쪽은 안평면, 서쪽은 구천면, 북에는 안계면, 안사면, 남으로는 봉양면과 군위군 소보면이 경계를 이룬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일본 가토 기요마사가 동로를 택해 물밀 듯이 함락하였으나 화장산성에 모인 지역민들이 항전하여 현의 문서와 기물을 화장굴에 훼손됨이 없이 지켜 보관하였으며 북진을 좌절케 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에는 비안현이 위치하였던 지역으로 서부 의성의 중심지였으며,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목숨을 내건 의거가 많았던 호국충렬의 고장이다. 특히 3.1운동 때에는 경상북도에서 항일의 기치를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난 시발지로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기념탑을 세우고 매년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진여심인당이 위치한 동부리는 산간지역으로서 감입곡류천이 흐르고 좁은 평야가 나타난다. 28번 국도가 지나 교통이 편리하다. 동부리 말고도 서부리가 있는데 이 둘을 총칭하여 비안 혹은 읍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연마을로는 상처고개와 앞내, 뒤내가 있다. 과거 사람들이 관가에 잡혀갔다가는 돌아오지 못하거나 상처를 입고 돌아왔으므로 상처고개라 하였고 위천이 남쪽 북쪽으로 흐르므로 각각 앞내, 뒤내라 칭했다. 서부리와 총칭해 비안 혹은 읍내라 부르기도 하며 비안군 군내면 동부동에서 의성군에 병합되면서 동부동으로 부르다가 1988년 5월 1일 행정구역개편으로 비안면 동부동이 비안면 동부리로 됐다.
 
진여심인당은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교화가 크게 일어나지는 못했다. 이곳 심인당의 초대 스승은 향연각(안수규, 재진) 스승이다. 4년여 교화에 매진한 향연각 스승은 진기 20(1966)년 12월 2일 선덕심인당(폐쇄) 개설과 함께 초대 스승으로 임명돼 전출갔다 진기 23(1969)년 7월 14일 다시 진여심인당으로 부임해와 진기 27(1973)년 4월 26일까지 교화를 책임졌다. 진기 36(1982)년 3월 29일 기로 지원했으며, 진기 41(1987)년 7월 28일 열반했다. 이어 효명진(이분주) 스승이 진기 27년 4월 26일부터 진기 60(2006)년 6월 27일 기로 진원할 때까지 교화에 임했다. 현재에도 효명진 스승이 관리하고 있다.
 
 
※바로잡습니다 753호 진언의 산실-불정심인당에서 중동심인당(행대심인당) 개설 시기는 진기 7(1953)년으로 바로잡습니다.
 
진여심인당
진기 15(1961)년 10월 20일 심인당 개설
                           향연각(안수규 또는 재진) 스승 임용
진기 16(1962)년 12월 31일 심인당 내부 개수
진기 17(1963)년 1월 17일 심인당 내부 완공
진기 20(1966)년 12월 2일 향연각 스승 선덕심인당으로 전출
진기 23(1969)년 7월 14일 향연각 스승 재 부임
진기 27(1973)년 4월 26일 향연각 스승 퇴직
                          효명진(이분주) 스승 임용
진기 60(2006)년 6월 27일 효명진 스승 정년에 의한 기로 후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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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san1080@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