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의 세계를 열다

밀교신문   
입력 : 202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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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창교와 초기 교화

(4) 참회원의 개설

 

계전의 교화가 자리를 잡자 교화를 우당에게 물려주고 진기 원년(1947) 9월 25일 양동의 관가정(觀稼亭)으로 교화 장소를 넓혀갔다. 양동은 월성 손 씨의 종가가 있는 마을이다. 관가정은 본래 월성손씨 3세조 손소(孫昭·1433~1484)의 둘째 아들로서 경주 동강서원(東江書院)에 배향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이 분가하여 살던 사가였다. 사랑채 누마루에 관가정이라는 당호를 붙여 집 전체를 관가정이라 불러왔다. 진선여중 손인수가 1980년대에 손소의 영정을 이곳에 배향하였다. 그런데 교사는 관가정 앞에 송첨(松簷)이라는 명칭을 붙여서 ‘송첨관가정’이라 부르고 있다. 송첨은 손소의 아호로서 그가 살던 서백당(書百堂·현 월성손씨 종택)의 큰 사랑방의 대들보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교사에 관가정의 명칭 앞에 송첨을 붙여서 송첨관가정이라 서술한 까닭은 알 수 없다.

 

양동은 월성손씨의 종가뿐만 아니라, 손 씨와 인척 관계에 있는 여강이씨의 종택도 있는 마을이다. 우재 손중돈의 생질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만큼 양동은 유가의 전통이 살아 있는 곳이다. 양동의 교화도 계동 교화방편에 따라서 처음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먼저 육자진언의 염송이라는 간편한 수행법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본성을 찾아서 사상(四相)을 없애고 원망하지 않고 은혜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이 새로웠다. 그 위에 삶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참회를 통하여 자신의 행위를 새롭게 개선해야 한다는 설법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나아가 남에게 의뢰하지 않고 자성불을 깨달아야 공덕을 크게 얻어 잘 살 수 있다는 말씀이 호기심을 일으켰다. 양동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당시 손 씨 종가의 종부가 심공에 동참하였다. 그러자 좋은 일에는 반드시 마장이 있듯이 대종사의 교화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반감을 드러내었다. 특히 배불과 숭유의 사고에 젖어 있는 유가의 인사들이 교화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항의를 시작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교사는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전기 계전동 도량은 손우당에게 맡기고 경주군 강동면 양동 송첨관가정에서 도량을 열고 교화를 개시한바 역시 교도들이 사방에서 운집하여 본성을 다 찾고 모든 고통을 해탈하였다. 아직 방편 선교지가 원만하지 못하였으므로 봉건 유가의 완고한 분들이 조희(阻戱)하고 관권을 의뢰해서 방해하므로 교화를 일시 중지하였다.”

 

전통 유가의 마을에서 이처럼 교화에 반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교화를 저지할 합당한 방안이 없어서 관권을 동원한 것이다. 그 당시는 사회가 몹시 불안한 시기였다. 관의 허가 없이 대중 집회를 할 수 없었다. 아직 적법한 관의 허가를 받을 만큼 준비된 상태가 아니어서 교화는 무허가 집회가 되었다. 관의 제지에 더 이상 교화를 지속할 수 없었다. 공공의 법과 질서를 지키고 존중해야 한다는 대종사의 생각이 불법(不法)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종사는 ‘봉건 유가의 완고한 분들이 조희하고 관권을 의뢰해서 방해’하는 것을 비난하지 않고 ‘아직 방편 선교지가 원만하지 못한’ 결과라고 참회의 실천을 하였다.

 

상대 허물보다 내 허물을 먼저 찾은 것이다. 관가정의 교화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양동의 교화는 약 1년 반이 지나 진기 3년(1949) 1월 15일 인광(仁光) 류풍산(柳豊山·1885~1959)을 파견하여 재개하였다. 대종사가 공식적으로 교화를 중지하여도 많은 신교도가 자발적으로 심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동 교화는 교화의 기틀을 갖추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양동 교화에서 처음으로 ‘참회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양동참회원’이라 불렀다. ‘참회원’은 교화의 장소, 동시에 교화 단체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교화의 방향과 성격을 구체적으로 ‘참회원’이라는 명칭으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교화를 불교라는 틀 속에 한정하지 않고 폭넓게 하려는 의미를 참회원이라는 명칭에 담은 것이다. 불법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보편적인 가르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동의 교화는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고향인 계전의 교화에 이어서 종가가 있는 곳으로 교화의 장소를 옮긴 일이다. 유가의 본향에서 교화하면서 큰 저항을 경험하고 선교방편(便巧方便)의 필요성을 확인하였다. 그 당시 교화는 두 가지 극복 과제를 경험하였다. 첫째, 전래의 민간 생활 습속과 유교적 의례의식이었다. 둘째, 서양 문물과 예수교의 신앙 형태이었다. 양동의 교화에서 이러한 과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편선교지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봉건시대와 민주시대, 의뢰와 자주, 정과 성품, 일원 통솔과 이원자주, 물과 심, 형식과 실천 등의 대비적인 설법과 교화방편을 마련하여 갔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실을 통해서 보편적인 가르침으로 교화의 폭을 넓히려는 노력을 지속하였다. 양동의 교화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

 

2) 교화의 전개와 심인불교

(1) 교화의 개척
양동참회원의 교화 중에 인연이 있는 곳부터 교화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포항에서도 교화를 시작하였다. 먼저 대종사의 상원동 속가에 도량을 개설하고(1,10.15), 동참자가 늘어남에 따라서 자회심(自悔心)의 자택으로 옮겼다(1,11.1). 그리고 정해영의 주택 전체를 도량으로 삼아서 교화하였다. 한편 포항의 교화를 시작하면서 대구에서도 원정각(源淨覺)이 남산동 청정심(淸淨心·신길이)의 자택에서 자발적으로 심공하면서 교화하였다. 청정심은 후일 교화에 동참한 소암(素庵)의 모친이었다. 청정심은 남편의 심한 외도로써 속병이 나서 고생하던 중에 이웃 원정각에게 육자진언의 공덕을 전해 듣고 심공하여 해탈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집 아래채를 교화 장소로 제공하고 원정각을 도와서 교화를 시작하였다. 그즈음 원오제(圓悟濟)와 실상행(實相行) 자매가 심공에 동참하여 대구 교화는 크게 일어났다. 원오제는 수도산 서봉사의 신도회 부녀회장으로 실상행과 함께 능인학교의 설립 모연금을 모으기 위해 남산동 골목길을 지나다가 육자진언 염송 소리를 듣고 찾아와서 심공에 동참하였다. 심공 동참자가 나날이 모여들자 대구의 신교도들이 대종사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대종사는 포항의 교화를 정해영 및 손원도(孫元道)에게 맡기고 대구에서 교화하였다(2,1.20). 대구 교화는 물밀듯이 일어났다. 심공 동참자들은 불상 앞에 공양하고 절하며 예불 드리는 불공보다 ‘마음 닦는 공부’를 주로 하는 불공이 신기할 만큼 느껴졌다. 신교도들은 가족과 친지에게 ‘새 불교가 나왔다’고 좋아하면서 참회원 이야기를 전하였다. 이렇게 참회원의 교화가 크게 일어나자 우선 현교의 인사들이 주목하였다. 먼저 참회원 인근에 있는 응원사(應圓寺) 주지 김원경(金圓鏡)이 관심을 가졌다. 그는 참회원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는 참회원을 응원사로 옮길 것을 제의하였다. 대종사는 도량을 응원사로 옮겨 교화하였다(2,2.20). 처음으로 해인(海印·한지에 인쇄한 경문 또는 말씀)을 인쇄 배포하였다(2,3.10). 해인의 내용은 사상(四相) 십악참회와 은혜의 말씀 등이었다. 이로부터 교화를 위하여 지속적으로 다양한 해인을 인쇄하여 활용하였다. 해인의 인쇄는 주로 김희옥(金熙玉·자비인)의 보시로 하였다. 자비인(慈悲人)은 이화여전 출신으로 응원사 신도회장이었다. 참회원의 심공법과 가르침에 마음이 이끌려서 참회원의 신교도가 되었다. 응원사의 교화가 활기를 더하여 신교도가 급속히 불어나자 김원경 등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는 사실을 인지하고 응원사의 교화는 그만두었다(2,3.10). 그 내막을 교사는 자세히 밝히고 있다.

 

“김희옥님의 단독 보시로서 갈망하던 해인을 처음 인쇄하여 각 교도에게 1부씩 배부하게 되어 교화상 편리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대 진전을 보게 되었으나 지도자가 아직 일체지지를 증하지 못하였으므로 현교지마들이 준동을 일으켜서 교화에 방해를 받기 시작하였고 5.10 선거장소 사용을 빙자로 도량의 명도를 요구한 것도 이의 일례이며 본사 원경승은 제자가 되어 겨우 교화의 방편을 표면으로 알게 되어서 교화 방편만을 찬양하는 것을 볼 때 방편을 모방하여 자기네들이 교화방편을 만들 의도가 은연중에 보였다.”

 

김원경은 참회원의 교화방편을 배우고 참회원의 신교도를 응원사로 인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응원사의 참회원 교화는 불교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큰 위기감을 주었다. 한편으로 그들은 대종사의 교화 방편만을 모방할 궁리를 하였다. 그 일환으로 응원사의 김원경을 앞세워서 대종사의 응원사 교화를 못 하게 할 구실을 찾았다. 김원경은 대종사가 응원사를 떠나면 신교도들은 자기가 배운 교화방편으로 교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가 마침 대한민국 건립을 위한 5월 10일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그래서 선거장소의 하나로 응원사의 사용을 빌미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대종사는 역시 스스로 ‘일체지지의 증득’에 먼저 원인을 찾았다.

 

응원사의 교화 이후 참회원의 교화가 불교계의 방해와 세인의 관심을 받으면서 교화에 큰 고비를 맞았다. 신교도를 모아서 대중 집회로써 교화하는 일이 어렵게 된 것이다. 하지만 관(官)의 허가를 받아서 공식적으로 교화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신교도들은 대종사의 지도하에 개별적으로 심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여건을 갖추어 계산동(桂山洞)의 건물 2층을 빌려서 도량을 열고(2,5.5) 대구경찰서에 2개월간 집회 허가를 받았다(2,5.15). 집회 허가를 위하여 참회원의 선교(宣敎)에 대종사, 원장에 김희옥, 부원장에 서행래(徐倖來)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참회원은 처음으로 관의 허가를 받아 교화하게 되었다.

 

계산동에서 관의 허가를 받아서 교화를 시작하자 수일 만에 200여 명의 동참자가 모여들었다. 남산동에 도량을 하나 더 개설하여 선교는 대종사, 하영택(河寧澤), 윤신진(尹信眞·원오제)을 대표자로 하여 경찰서의 집회 허가를 받았다(2,5.30). 신교도들이 계속 밀려들자 시장 북통으로 장소를 옮겨 참회원을 개설하였다(2,9.1). 역시 선교는 대종사, 대표자 배덕원(裵德遠), 대리대표 하영택으로 변경하였다. 남산동의 교화가 발전하면서 대구 전역에서 신교도들이 몰려들었다. 그때 김희옥이 건물을 무상으로 제공하여 대봉동에 참회원을 설치하고(2,12.15) 송두남(宋斗南)에게 교화하게 하였다. 이어서 동성로에 건물을 임대하여 참회원을 개설하여(2,12.20) 윤신진에게 교화하도록 하였으나 마장이 많아서 그만두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남산동 참회원의 신교도들 사이에 참회원을 건축하자는 열성이 높아갔다. 참회원 건축을 결정하고 남산동 84번지에 부지를 구하였다(3,2.20). 건축 경비는 신교도들이 유상무상의 희사로써 충당하고 이영중(李榮重)이 감독하였다. 건축은 음력 3월 초에 착공하여 음력 7월 말에 가(假) 준공하고 교화를 실시하였다. 남산동 참회원이 완성되어 시장 북통 참회원과 동성로 참회원은 남산동 참회원에 이전하였다(3,7.30). 참회원의 개설은 지속적으로 확산하였다. 남산동 교화와 동시에 경주 황오리에도 교화가 시작되었다. 자회심이 포항에서 경주로 옮겨서 자택에서 교화하였다(2,5.16). 신교도가 많이 모여들자 신교도 자비(慈悲)의 집으로 옮기고(3,12.20) 다시 참회원을 건축하여 교화하였다(4,11.9). 그즈음에 울릉도 배관천(裵觀天)의 주택에서 참회원을 개설하고 심인각(心印覺)이 지도하였다(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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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종 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