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의 세계를 열다

밀교신문   
입력 : 2020-07-13 
+ -

3. 창교와 초기 교화

1) 교화의 시작과 참회원
 
(1) 대종사의 깨달음
대종사는 100일 정진 중에 고성염송에서 심상염송(心想念誦)의 이득과정(已得過程)을 거치면서 염송삼매(念誦三昧)를 증득하였다. 진언염송의 수행은 음성염송에서 심송(心誦)으로 수행의 경지가 깊어지면서 심신이 정화되고 삼마지의 상태에 이르게 한다. 삼마지의 경지는 늘 지금 여기의 청정한 마음에 머물러서 몸과 마음, 그리고 나와 세계가
 
일여(一如)한 경지를 내관(內觀)하게 한다. 대종사는 먼저 육자진언의 염송수행으로 심신이 상연하고 신병이 돈유되는 불가사의한 경험을 하였다. 그리고 심일경(心一境)의 삼마지를 체험하고 법계진리를 내관하는 경지를 체득하였다. 나아가 법계 천지의 은혜가 지중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육자진언의 묘리를 증득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에 대하여 대종사의 비문은 “5월 16일 새벽 심신이 상연(爽然)하여지고 문득 동천에 솟는 태양을 보매 불은의 무변함과 천지은혜 지중함을 몸에 사무치게 느끼신 후 홀연히 대각을 성취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종사는 불법에 인연하여 10년의 수행과정을 거치고 농림촌의 대정진을 통하여 46세(1947) 5월 16일에 진각을 성취하였다. 깨달음은 훗날 대종사의 행적에 비추어서 진각(眞覺)이라 일컫는다.
 
(2) 농림촌의 교화
대종사의 진각은 삶의 여정을 새롭게 하였다. 진각을 성취한 후 지난날에 수행한 곳들을 돌아보면서 그간 남겨둔 세간의 일들을 정리하고 다시 농림촌에 돌아왔다. 농림촌의 수행처소에는 함께 수행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대종사와 수행을 함께 하면서 육자진언의 묘리와 진각에 깊은 신심을 일으키고 있었다. 농림촌에서 얼마간 깨달음의 경지를 사색하며 교화의 방향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약 한 달이 지나 진기 원년(1947) 6월 14일 최초의 교화를 착수하였다. 대중은 대종사를 중심으로 수행 정진하였다. 농림촌의 교화동안 진각의 심경을 내관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교화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방향을 세우는 과정으로 삼았다. 농림촌의 환경여건이 교화를 지속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당시 농림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일시적인 정착민이었다. 또한 대다수 당면한 생존에 시름 하면서 사도적(邪道的)인 기복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농림촌 교화는 한 달 후 7월 15일 중지하였다.
 
(3) 계전동의 초전법륜
대종사는 농림촌 교화 중에 교화의 새로운 인연지를 궁구하였다. 그리고 구법수행 중에 머물었던 고향 계전동(桂田洞)을 새 교화 장소로 정하였다. 농림촌 교화를 중지한 지 약 한 달 후 8월 17일 계전에서 다시 교화를 시작하였다. 우선 우당(愚堂·1892-1977)의 사랑방에서 3주간 심공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심공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우당의 사랑방이 넘쳐났다. 수행정진 당시에 머물렀던 재실인 송헌재로 심공장소를 옮겼다. 송헌재는 계동의 입향조인 10대조(월성 손씨 12세) 송헌(松憲) 득상(得尙)의 재실이다. 송헌재는 월성 손씨 계동파의 재실로서 대종사와 인연이 깊다. 송헌재는 계동서당(桂洞書堂)에서 출발한다. 계동서당은 1693년에 세워졌다. 그 후 1820년 중수하여 4칸의 기와집으로 개축하였다. 그리고 송헌재라는 현판을 재미(齋楣·재실의 정면)에 걸었다. 그런데 1936년 대종사가 기존의 현판보다 더 큰 송헌재 현판을 마련하여 재실 안의 마루 강당의 벽면에 걸고, 재미에 걸려 있던 기존의 현판은 문중의 의견을 모아서 내렸다. 따라서 교화를 할 당시의 재실 명칭은 송헌재였다. 그런데 그 후 1968년 계동파 문중은 의견을 모아서 이송정(二松亭)이라는 현판을 다시 걸었다. 이송은 10세 송암(松巖·중삼)과 12세 송헌(松憲)에서 송(松)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건물의 구조가 재실의 형식이지만 구태여 정자를 붙인 것은 문중의 사정이 좋아지면 정자(亭子)에 합당하는 건물을 지으려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이송정은 명칭에 어울리는 건물을 지을 때까지 한시적으로 사용하는 현판이라는 의미이다. 그 후 문중의 의견을 모아서 모든 현판을 다시 내려 버렸다.
 
대종사는 농림촌 수행 중에 구상한 교화방편으로 교화를 실시하였다. 처음 심공 동참자들은 보통 3주간의 심공을 계속하게 하였다. 매일 오전 2시간 오후 2시간 저녁 1시간씩 하루 최소한 5시간 이상의 염송을 하게 하였다. 식사하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오로지 진언 염송에 전념한 것이다. 그리고 틈틈이 설법하였다. 특히 앉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염송을 소리 내어서 하면서 심공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훗날 교사는 농림촌의 최초 교화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손 회당님의 창교로서 육자심인 및 금강경 사구게 무주상법과 법화경 십악참회 등의 국역한 원해인(原海印)으로서 공부한 결과 여하한 질병자라도 다 낫게 되는 방편을 만들어서 달성군 성서면 속가에서 교화에 착수하였다.”
이어서 계전의 교화에 대해서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경상북도 영일군 계전동에서 상기의 해인 방편으로 교화를 시작하는데 교도 병환자가 많이 들어와서 이때는 거개가 난치병으로써 가산은 탕진하고 가정은 불화한 이가 많았다. 그러므로 병이 낫는 동시에 일체고통은 해탈하며 비로소 자성불이 있음을 깨닫고 부자자효(父慈子孝)하고 부화부순(夫和婦順)하며 모든 서원이 다 성취되었다.”
 
대종사는 수행 중에 이미 금강경과 법화경 등을 공부하고 인쇄 반포하였다. 그리고 교화를 시작하면서 육자진언의 염송을 수행의 기본으로 하고, 우선 금강경의 무주상법과 법화경, 그리고 십악참회를 주요 방편으로 삼았다. 대종사는 교화를 시작하면서 수행정진을 통해서 깨닫고 증득한 내용을 언설로 표현하고 실천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교사의 기록도 수행정진의 과정에서 마음에 품고 있던 심경을 표현한 한 부분이다. 대종사는 당시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경전의 가르침을 찾아내었다. 그중 하나가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의 무주상법이다. 금강경은 반야지혜에 의한 무주상의 보살행을 강조하고 있다. 대종사는 무주상법을 자내증하여 새롭게 해석하고 무상법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무상법은 처음 아집 등 사상(四相)을 다스리는 실천에서 시작하여 무등상불의 교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전개하였다.
 
대종사는 무주상과 더불어 참회법을 주요한 수행덕목으로 삼았으며 대정진 과정에서 참회의 낙루를 경험하였다. 그 참회는 불은과 천지의 은혜에 대한 깊은 통찰 과정에서 자기 성찰의 심경으로서 저절로 솟아난 것이었다. 참회의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불교의 십악참회를 수용하였다. 무주상과 참회는 깊은 관계가 있다. 참회법도 개인의 허물을 참회하는 유상 참회에서 무상의 진리를 깨닫는 ‘무상참회’까지 교법의 전개 과정을 가지고 있다.
 
대종사는 무주상 참회법과 더불어 법화경의 교설도 받아들였다. 법화경은 그 자체 일승(一乘)으로서 불승(佛乘)의 신행을 강조한다. 불승의 신행을 통하여 무여중생(無餘衆生)이 불승에 드는 것을 구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중생이 남김없이 불승에 들게 하려는 회향의 교설을 수용하였다.
 
모든 중생이 불승에 이르게 하려는 뜻을 담아 무상과 참회를 실천한 것이다. 대종사가 처음 교화의 방편으로 무상·참회·불승의 교설을 삼은 것은 당시의 정세와 관련이 있었다. 교화를 시작할 당시의 정세를 서술한 교사의 기록을 보면 대종사의 시대관을 읽을 수 있다.
 
“36년간의 일제 학정에 물심양면의 고난을 겪고, 해방 이후는 급속도의 사상적 물질적 혼란으로 모든 질서가 문란함에 따라 수신도덕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오백 년 숭유배불하든 끝에 일본불교와 같이 겨우 대중불교로 향하고 있으나, 아직 각성(覺性) 종교는 일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국민 거개가 대소병을 막론하고 의약으로서는 완치할 수 없는 질병이 말할 수 없이 허다하였든 특수한 시대이었던 것이다.”
 
대종사는 당시의 상황을 우선 사상적 물질적 혼란 시대로 보았다. 일제의 학정과 해방정국의 무질서에 의해서 수신 도덕이 무너지고 의약으로 완치할 수 없는 질병이 허다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시대 상황의 치유는 각성종교로서의 대중불교를 일으켜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각성종교로서 대중불교를 세우고 육자진언의 수행을 통하여 무상과 참회를 실천하고 모든 사람이 자성불을 깨닫도록 교화를 시작하였다. 이처럼 무상·참회·자성불의 교화방편은 교화의 이득 과정을 거치면서 밀교의 교설을 통하여 정치(精緻)한 교법체계로 전개하였다. 계전동의 교화는 병고의 해탈과 가정의 화순 등 세간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힘을 쏟았다. 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심공 중에서 결국 자성불을 깨달아서 일체의 고통을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사의 기록 중 “이때는 거개가 난치병으로써 가산은 탕진하고 가정은 불화한 이가 많았다”는 내용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병·빈·불화 등의 고난이 당면한 문제였다. 병고·빈고·쟁(불화)고의 삼고(三苦)가 당시의 대중이 겪고 있는 당면한 고난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병·빈·쟁의 고난은 상호 원인과 결과가 되어 세간의 생활을 더욱더 어렵게 하는 것으로 여겼다. 난치병의 치료는 가산의 탕진으로 이어지고 가산의 탕진은 결국 가정의 불화를 불러온다. 이처럼 당면한 현실의 고난을 해결하려면 우선 참회법이 필요하였다.
 
참회심공은 먼저 자신을 철저히 살펴서 자기 허물을 찾고 고치는 데서 시작한다. 육자진언을 지심으로 염송하면 마음이 밝아지고 내 허물이 드러나서 절실한 참회를 하게 된다. 참회가 지극하면 동시에 아집을 버리게 되고 병·빈·쟁의 당면고(當面苦)는 결국 자기 허물과 아집의 결과라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 참회와 아집의 상(相)을 버리는 과정에서 당면고가 해탈되고 동시에 본심을 찾아 자성불을 깨달아 일체고를 해탈할 수 있다. 즉 참회하고 상을 다스려야 자성불을 속히 볼 수 있고, 자성불은 능히 모든 고통을 해탈하게 한다는 법문이었다. 여기서 상은 ‘나’라는 생각이 만들어 내는 인습적인 사고와 행위 등을 포함한다.
 
부귀한 사람은 부귀한 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자신이 처한 현실에 집착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이 많은 사람은 유세하고 자만하기도 하고, 혹은 자책하기도 원망하기도 하는 등 굳어진 고집에 묶여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새롭고 발전적인 생각이나 행동보다 부정하고 거부하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당시 교화 중에 참회하여 관습에 고착하고 있는 상을 버릴 것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래야 무엇인가 바꾸고 변화를 시켜서 발전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병·빈·쟁의 고난을 해탈하자 심공하려는 사람들이 나날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계전동은 실질적으로 교화를 시작한 초전법륜의 터전이 되었다.

4면-관가정.JPG

-진각종 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