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언의 산실-광명심인당

밀교신문   
입력 : 2020-06-08  | 수정 : 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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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 본부가 서울로 이전을 완료한 시기에 건립된 심인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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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 11(1957)년은 심인중학교에 이어 심인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얻었다(3월 21일). 신청서를 제출한 지 2달여 만의 일이다. 그리고 진기 10(1956)년 6월 국가적·사회적으로 큰 재난을 당하였을 때 구호금과 종단 내외적 상부상조를 위한 보조부의, 지역사회의 위로 찬조금 등을 위해 서울 밀각심인당과 대구 희락심인당 등 두 곳의 심인당에 ‘제시함(濟施函)’을 시범 운영한 이어 전국 심인당에 ‘제시함’을 배부 설치했다(2월 18일). ‘제시함’을 이용한 제시 불공법은 후에 경전 출판 등을 위해, 별도 희사하는 경시법과 더불어 종단의 주요 3종 희사법으로 정착됐다.

 

대종사는 스승들에게 ‘장세함(藏稅函)’을 설치토록 했다(7월 18일). ‘장세함’은 어떤 종교에도 볼 수 없었던 진각종단만의 독특한 도구였다. 세금을 내기 위해 미리 조금씩 돈을 모아두는 일종의 저금통이다. 이 저금통의 용도는 오직 세금을 내는 데만 사용하기로 되어 있어 ‘장세함’이라고 했다. 당시 세금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부족해 세금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종사는 한꺼번에 많은 금액을 내기보다는 조금씩 모아 두었다가 세금을 내면 남보다 먼저 쉽게 국민의 의무를 다할 수 있고, 또 이것이 나도 잘되고 나라도 잘되는 아타자리의 방편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다시 말해 나라와 국민들의 자주 의식을 심어 주려는 구체적 실천 계몽 운동의 일환이었다. 특히 ‘장세함’을 통한 대종사의 세금 인식에 대한 노력은 스승은 물론 교도들에게 물질의 자주정신을 함양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 상징적인 일 중의 하나는 진기 10년 시작된 대구 본부의 서울 이전 완료다(4월 29일). 종단의 발상지였고 개종 이후 10년간 종단의 본부가 있었던 대구는 국가의 행정 조직이 전쟁 종료 후 다시 서울로 이전함에 따라 전국적 교화를 관장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본부를 서울로 이전한 후 대종사가 처음을 한 일은 지방 순회 법회다. 법회는 그동안 법난으로 심적 고통을 겪은 스승들과 신교도들의 신심을 다독이기 위함이었다. 4월 29일부터 시작된 지방 순강은 5월 5일까지 대구지역 10곳을 순례했으며, 5월 6일에는 포항, 경주교구 심인당, 5월 7일과 8일에는 부산지역 심인당을 순례했다. 지방순회에 이어 실시한 것이 스승들의 교리 재무장을 위한 합동강공회(合同講工會)다. 7월 12일 대종사는 남산동 심인당에서 합동강공회를 1일간 실시했으며 11월 29일에는 대구·경북지구를 제외한 전국 각 도의 스승들을 서울에 모아 중앙강공회를 실시했다. 강공회는 스승들을 위한 교학 강론 및 교화 연구, 수행 등을 논하는 토론의 장이 되면서 오늘날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실시하는 강공회로 정착되었다. 5월 29일에는 6시간 하루정진을 폐지하고 3시간 정진을 매월 2회 이상 하는 것을 심학 강공으로 정했다. 이와 함께 종단 내 각종 건축 불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태광토건’의 건축회사를 조직했다(8월 2일).

 

밀교교리 확립 등 교학 체계 정립을 위한 작업도 이시기 이루어졌다. 대외적으로 종단을 알리고 신교도들의 신심을 깊게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교리와 의식을 이해시킬 필요성을 느껴 교리적인 부분부터 이론 정리를 시작했다. 교주를 ‘법신비로자나불’로 정하고 ‘육대·사만·삼밀’을 ‘채상용’으로 하는 교리를 확립했다(8월 12일). 이때부터 ‘진각님’이라는 명칭은 교리 설명에 있어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교주법신 비로자나불의 교설이 확정되자 육자진언도 법신 비로자나불의 진언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오불의 상징으로 정리됐다. 종단 자료에는 오불과 육자진언의 상징관계는 ‘관세음육자대명왕신주경’에서 시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오불과 육자진언을 몸에 배열 포자하는 행법이 채택되고(9월 27일), 육자관념도를 왕십리심인당(밀각심인당)을 시범적으로 실시했으며(10월 11일), 인계를 금강지권으로 정리했다(11월 20일). 이때부터 삼십칠존의 명호를 문자로 써서 심인당에 기본 해인으로 모시게 됐다(11월 1일). 종단의 교법과 행정을 이원화하는 조치도 이루어졌다(11월 18일). 종단의 최고 지도자인 ‘선교(宣敎)’의 자리 위에 ‘인정(印定)’이라는 상징적인 자리를 두었다. ‘인정’이라는 품위는 법통을 의미하는 종단 최고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자리였다. ‘인정’의 자리에는 대종사가 추대됐다.

 

대종사는 역경불사 착수와 동시에 종단 자체의 출판사의 동록도 병행 추진했다.
9월 14일 ‘심인불교 금강회 해인행’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사 등록을 청구해, 11월 10일 문교부로부터 정식 등록됐다. ‘심인불교 금강회 해인행’은 진기 15(1961)년 12월 순정출판사로 일시 명칭이 변경되었으나 현재에는 ‘도서출판 해인행’ 재등록돼 종단의 각종 불서 및 양서를 출판하고 있다. 이 밖에도 대일경, 보제심론 변역 등의 작업도 이루어졌으며, 정진하는 사람임을 알리기 위해 왼쪽 가슴에 달았던 우담화를 폐지했다(11월 7일).

 

진기 11년에 개설된 심인당은 왜관심인당(4월 5일·폐쇄)과 어일심인당(7월 8일·광명)이 개설됐으며 현재는 광명심인당(경북 경주시 양북면 경감로 2440-5) 한 곳만 남아 있다.

 

광명심인당은 동쪽은 감포읍, 남쪽은 양남면, 서쪽은 불국동·보덕동과 외동읍, 북쪽은 포항시 오천읍과 장기면에 접한다. 심인당이 있는 경감로(어일)는 평지가 대부분의 지대를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도로명으로 바꾸기 전의 명칭인 어일은 마을 앞산의 지형이 고기 한 마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곳 심인당 초대 스승은 대일정(권기호 ) 스승이다. 진기 11년 7월 스승으로 임용돼 진기 23(1969)년 8월 21일 입적할 때까지 교화를 책임졌다. 이어 선심월(정농선) 스승이 진기 52(1998)년까지 29년간 평생을 교화일선에서 수행 정진했다. 선심월 스승은 제4~7대 종의회 의원에 종의회 의원으로 연이어 선출되면서 종무행정에도 참여했으며, 올곧은 수행과 활발한 교화활동을 펼쳤다. 진기 52(1998)년 5월 일선에서 물러나며 기로진원 했으며, 진기 66(2012)년 7월 4일 열반했다. 선심원 스승 후임에는 자혜정(박정옥) 스승이 진기 54(2000)년 5월 1일 퇴임 때 까지 책임졌다. 뒤를 이어 관명(정영진)·일행지(천명옥) 스승이 진기 61(2007)년 12월까지 7년간을,  혜진(김수형)·진여화(윤미라) 스승이 진기 67(2013)년 10월까지 6년간을 중생교화와 심인당 발전을 위해 매진했다. 현재는 신수심인당에서 부임한 일연(최우석)·정향시(임아영) 스승이 교화에 임하고 있다.

 

광명심인당
진기 11(1957)년 7월 8일 심인당을 개설
                      7월 10일 대일정(권기호) 스승 임용
진기 18(1964)년 3월 30일 심인당 명칭을 광명으로 개칭
                      9월 28일 심인당 및 사택 신축
진기 19(1965)년 1월 31일 선심월(정농선) 스승 임용
진기 23(1970)년 8월 21일 대일정 스승 열반
진기 52(1998)년 5월 12일 선심월 스승 기로진원
                      5월 14일 자혜정(박정옥) 스승 상석심인당에서 부임
진기 54(2000)년 5월 1일 자혜정 스승 퇴임
                     12월 21일 관명(정영진)·일행지(천명옥) 스승 임용
                     12월 26일 광명심인당 개축 헌공불사
진기 61(2007)년 12월 11일 관명·일행지 스승 아축심인당으로 전출
                                   혜진(김수형)·진여화(윤미라) 스승 임용
진기 67(2013)년 10월 29일 혜진·진여화 스승 관음심인당으로 전출
                                   일연(최우석)·정향시(임아영) 스승 신수심인당에서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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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san1080@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