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의 세계를 열다

밀교신문   
입력 : 20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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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당대종사의 수행과 진각(4)

(3) 생식 수행을 시작하다
제과 공장 화재 이후 대종사는 또 다른 사업을 구상하였다. 수행정진 중에서도 사업의 큰 가닥은 직접 구상하고 그 후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그것은 광산업이었다. 광산업은 일제가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을 거치면서 시행한 군비증강 정책의 하나였다. 일제가 금광 탐사의 비용을 지원하고 금을 비싸게 사들이자 많은 사람이 광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광산업에 관한 책들이 출판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부추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산업을 시작한 것은 민족자본의 문제도 있었다. 그 당시 일제는 한반도의 산업을 독점하는 정책을 폈다. 특히 광업은 90% 이상 일본인의 자본이었다. 한민족에 의한 자본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광산업의 비약적인 진흥은 일제의 획책인 것을 알고 나서 광산업을 불시에 중지하였다.
 
그즈음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교화의 문을 연후에도 가끔 주위 사람들에게 언급한 일이었다. 그것은 삼(대마) 사건이다. 그 당시 삼장사도 매우 중요한 사업으로 큰 관심을 끌고 있었다. 김두하가 먼저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종사에게 삼을 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때 대마사업에 대해서 정보가 밝다는 사람을 만났다. 이웃에 살면서 자주 관계가 있던 젊은 사람이었다. 대종사는 그 사람에게 대마를 구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대마 구매비를 받아서 대마를 구매한다면서 이북으로 가서 소식이 없었다. 대마 구매비용은 적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대마 구매비를 대신 갚아야 하였다. 물론 김두하는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종사는 교화시작 이후 가끔 법문하면서 당시의 일을 참회하기도 하였다. 대마 구매비를 온전히 갚지 못한 것이다. 그 남은 부분이 늘 마음에 남은 것이다. 무엇이든 갚을 것은 갚고 살아야 한다는 법문은 그래서 더 설득력을 얻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대종사의 수행정진은 용맹을 더하였다. 몸과 마음을 함께 다스리는 수행을 찾았다. 그리고 생식 수행을 시작하였다. 43세(1944)의 일이다.
 
생식의 시작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 일제는 광산업뿐만 아니라, 산미증산(産米增産) 정책을 펴고 있었다. 일제의 산미증산 정책은 1918년 일본의 쌀 부족 파동으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1940년대에는 조선의 산미증산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그래서 생산한 쌀은 일본으로 가져가서 국내에는 쌀이 무척 귀했다. 대종사의 생식 수행은 국민들이 겪고 있는 쌀 부족의 고통을 함께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래서 고향인 계전에 땅을 더 구입하여 쌀농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생산한 쌀을 비밀리에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를 계기로 계전에 머물면서 약초를 심고 동네 사람들에게 유교, 불교 등의 경전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고향 마을에서 조용히 수행하면서 수행의 한 방편으로 약초도 기르고 교육도 하였다. 후에 첫 교화지로서 계전을 택한 것도 이러한 체험이 작용하였다. 이처럼 대종사의 구법정진은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구법순례이고, 둘째는 전법불사이다. 구법수행을 위해서 특정의 장소나 인물에 오랫동안 머물지는 않았다. 자신이 알아낸 사찰과 인물을 찾아 수행 정진하고 법담을 통하여 구법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것이 자신의 수행과 더불어 직접적 전법 활동으로 이어졌다. 불상을 조성하고 경전을 인쇄하고 반포하는 일, 그리고 가족과 친지들에게 독경을 권유하여 불법으로 인도하였다.
 
(4) 전법의 방향을 모색하다.
대종사는 구법과 전법활동에 몰두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에 변화를 일으켰다. 특히 시야에는 시대상황의 어려움과 국민의 생활고가 처절하게 들어 왔다. 여기에는 대종사가 불법에서 느낀 심경이 크게 작용하였다. 특히 불교의 불성사상과 자비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사회와 나라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젊은 시절 유교경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중에서 특히 ‘대학’의 경문(經文) 첫 장의 소위 삼대강령과 팔조목이 품고 있는 본말의 이치에 큰 관심을 보였다. 즉 “물사에는 본말과 종시가 있고 그 선후를 알면 도에 가깝게 된다”는 이치와 치국과 평천하의 실천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리고 치국평천하는 삼대강령인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고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것”이 근본이 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런데 후에 불교의 불성사상을 만나고서 불성의 실현이 치국평천하의 근본이라는 신념이 더욱 굳어졌다. 아들 서주에게 “남자는 활동적인 일을 해야 한다”면서 정치학을 선택하게 하였다. 여기서 일컫는 ‘활동적인 일’에는 정치라는 함의를 품고 있었다. 대종사는 불성의 실현을 위한 수행정진은 결국 치국평천하로 회향 되어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종사는 국가와 사회의 문제 해결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 국가와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구법순례를 하면서 많은 대덕들을 만나면서 식민지 상황의 나라에 대한 담화도 나누었다. 그러나 그 직접적인 계기는 일본의 광공업 정책과 산미증산 정책을 직접 겪으면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실천을 처음에는 자신의 수행정진과 연계시켜서 구체화하였다. 그 일이 계전의 생활이다. 대종사는 상원동으로 이사를 한 후 고향 계전에 전답을 마련하였다. 논에는 쌀농사를 짓고 밭에는 약초 등을 심었다. 그리고 그 밭을 심수전(心修田)이라 하였다. 그 밭은 단순히 곡식을 경작하는 노동의 장소가 아니라, 수행정진을 하는 ‘마음을 닦는 밭’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천행으로서 계전에 머물러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문중의 재실인 송헌재(松憲齎)에서 지내며 수행 정진하였다. 고행정진은 강도를 더하였다. 심수전은 비학산 남쪽 신분릉(新墳陵)의 자락에 있다. 비학산은 포항시 북구 신광면과 기북면의 경계에 있는 해발 762m의 산이다. 1940년 즈음에 그 산자락을 몸소 개간하여 심수전이라 이름 짓고 수행지로 삼았다.
 
지금 신수심인당의 뒷길에서 북쪽으로 1㎞ 지점에 있다. 그 당시 손수 접목한 감나무가 고목으로 남아 있었다. 대종사는 처음 일가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다가 그 일이 잦아지자 자신이 재실에서 끼니를 직접 마련하였다.
 
그러나 생식을 시작하면서 끼니는 자연스럽게 해결하였다. 대종사는 염천의 여름철에는 햇볕이 비교적 약한 아침과 늦은 오후 농부들이 일할 때 재실에서 심공(心工)하고, 그들이 쉬는 한낮에는 들에 나가 노동일을 하였다. 그리고 엄동설한의 겨울철이 오면 농부들이 일하는 한낮에는 재실에서 심공하고, 그들이 쉬는 아침과 저녁에는 들에 나가 일하였다.
 
그러다보니 여름에는 강렬한 햇볕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윗도리를 벗고 일하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햇살에 몸이 그을리고 피부가 타서 수포가 생기는 등 상처가 심하였고, 겨울에는 혹한에 동상에 걸려 마비성 부종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치료할 것을 권유하면 “세상 사람들은 약물로써 치료하지만 나는 ‘마음 쓰는 요법’으로 치료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였다. 손수 심수전을 개간하여 수행정진의 고행처로 삼은 대종사는 체험하고 증득하는 실행정신을 중하게 여겼다.
 
훗날 “자신이 체험 증득하지 않은 법을 설하지 말라”는 법문을 하신 까닭도 여기서 연유한다. 이처럼 대종사는 계전을 수행정진의 본거로 삼고 포항과 계전, 그리고 주요한 사찰과 인사들을 찾아서 법담을 나누고 고행 정진을 하였다.
 
(5) 도덕정치를 구상하다
대종사는 중생사회의 문제해결을 모색하던 중 사회참여의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정치문화를 생각하였다. 치국평천하의 정치문화가 국가와 사회 문제 해결의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대종사는 ‘도덕정치’라는 정치강령을 구상하고 소위 정법정치의 길을 모색하였다.
 
대종사가 현실 정치에 뜻을 두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있었다. 대종사는 6대조인 무민재(无悶齎)의 문집을 편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무민재(1785~1858)의 휘는 염조(念祖)이고, 자는 백원(白源), 별호는 약서(藥西)이며, 무민재는 후호(後號)이다. 그는 정조 9년 을사(1785)년에 계동에서 탄생하여 철종 9년 무오(1858)년에 74세로 명을 다하였다. 그는 문행이 뛰어났으며 말년인 1848년에 무민정을 지어서 학구에 매진하고 후학을 양성하여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무민정은 지금 계전에 학고정(鶴臯亭)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후손들이 이씨 가문에 넘겼기 때문이다. 무민공은 많은 시문을 남겼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재실과 다른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서 후일에 문집 4권으로 인간(印刊)되었다.
 
대종사가 문집의 간행을 주도하였다. 그런데 문집의 서문은 1944년 5월에 썼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문집의 후기에 해당하는 근지(謹識) 중에는 1923년에 쓴 글이 있다. 이것은 곧 문집의 간행을 그 이전부터 준비해 왔다는 것이다. 문집 끝에는 그 연유를 밝힌 대종사의 근지도 있다. 근지의 내용을 감안하면 그 일을 부친이 진행하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대종사가 이즈음에 문집 간행을 구체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리고 1950년 석판 인쇄로 최종적으로 간행하였다. 그런데 대종사는 문집을 간행하면서 변영만(1889~1954)에게 서문을 청탁하였다. 실제 문집에는 그의 아들 민보(敏甫)가 1944년 5월에 쓴 서문이 실려있다. 아마도 대종사의 부탁을 받고 그 일을 아들에게 맡긴 것으로 보인다.
 
변영만은 법률을 전공하여 법관과 변호사로서 활동하고, 한편 한문학의 대가로서 성균관대학의 교수를 역임하는 등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대종사는 문집간행을 계기로 자연히 변영만과 친분을 쌓으면서 나라의 상황과 정치에 관한 생각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 변영로(1897~1961)를 소개받았다. 변영로는 영문학자이면서 시인으로서 나라를 걱정하던 지식인이었다. 대종사는 변영만의 형제들을 통하여 많은 지식인과 정치인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알려진 인사는 백관수(1889~?)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해방 후에 정치인으로서 활동하다가 6·25때 납북되었다.
 
대종사는 해방되던 해의 추석 이튿날 측근 익당(손중달·1911~1980)을 대동하고 상경하였다. 자신이 구상한 ‘도덕정치’의 강령을 중심으로 변영로, 백관수 등의 정치인과 지식인을 만나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해방정국의 정치상황은 미국, 소련 양국이 남북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남한에는 민주·공산주의를 표방하는 50여 개의 정당이 난립하여 정치적 혼란이 극심하였다. 또한 정치적 무질서뿐만 아니라, 일본에 의존하고 있던 경제 상태는 더욱 혼란하였다. 대종사는 많은 인사와 해방 후의 나라의 안정과 발전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런데 해방정국의 현실정치의 냉혹성과 혼란을 목격하고 정치적 사회 참여의 길을 석 달 만에 접고 동짓달에 귀향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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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종 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