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의 세계를 열다

밀교신문   
입력 : 2020-05-25 
+ -

2. 회당대종사의 수행과 진각(3)

(4)사회생활을 체험하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청년 덕상은 우선 면사무소에서 일을 하였다. 일본 경험과 한학의 지식이 면사무소 근무를 가능하게 하였다. 면사무소 근무는 2년 정도 하고 그만두었다.
 
25세(1926)에 규상(圭祥)으로 개명하고 도동으로 이사하여 학용품 가게를 열었다. 장남(창수)이 태어나자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학용품 가게는 기대 이상으로 발전하여 포목·잡화·미싱 등으로 넓혀갔다. 이렇게 해서 청년 규상은 사업가로 알려졌다. 이즈음 포항의 사업가들이 울릉도를 자주 왕래하였다. 사업가 규상은 이들과 거래를 하였다. 모두가 대종사의 성실성과 사업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거래를 자청하였다. 특히 그중에 포항의 큰 사업가 김두하(金斗河)가 젊은 사업가 규상의 사업능력을 눈여겨보고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마치 형제처럼 교유하게 되었다.
 
김두하·김두만·김두수 삼형제는 당시 포항의 경제계에 큰 활약을 하였다. 김두하(1894~1957)는 1920년부터 포항상공수산회 조직준비위원 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1933년 포항상공회 설립의 발기인이 된다. 그리고 그해 8월 발족한 포항상공회의 초대 및 2대 부회장을 맡는다. 회장이 일본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포항상공회에서 김두하의 활약은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포항상공회가 1954년 포항상공회의소로 재창립될 때 김두하는 발기인 대표 및 임시의장을 맡아서 산파 역할을 한다. 김두하는 젊은 사업가 규상을 매우 크게 평가하고 형제처럼 아끼며 포항으로 이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런데 조부가 몹시 반대하였다.
 
젊은 사업가 규상은 26세(1927)에 부친이 사망하자 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9세(1930년 4월 3일)에 사업 환경이 좋은 포항으로 이사하였다. 경북 영일군 포항면 포항동(현 남빈동) 487번지가 포항의 첫 번째 정착지이다. 물론 김두하 집의 일부분이었다. 그만큼 김두하는 젊은 사업가 규상을 크게 도와주었다. 여기서 포항의 유력 사업가들과 거래하면서 사업을 확장하여 갔다. 잡화점·포목·제과, 그리고 축돈(蓄豚)을 비롯한 가축도 길렀다. 사업 활동을 왕성하게 하면서 신용을 중요하게 여겨서 믿을만한 사업가로 알려졌다. 그러자 사람들이 찾아와서 교유하기를 희망하였다. 사업의 규모가 커가자 자신의 호를 춘농(春儂)이라 하고 사업을 춘농상회라 하였다.
 
춘농상회에 사랑방을 마련하고 사업뿐만 아니라 지역의 유력 인사들과 경학(經學)도 함께 논의하면서 교유하였다. 사서삼경을 읽고 토론하는 등 인생과 사회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특히, 주역과 풍수지리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아마도 식민지 국가의 장래와 국민의 생활상을 염려한 까닭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포항에서 유력 사업가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 대종사는 유교 경서의 본말(本末)사상과 서양문물의 과학적 혁신 사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3) 구법정진의 편력
(1) 불법을 만나다
대종사가 사업을 키우고 유교의 경학 등에 열중하고 있는 즈음에 조부가 돌아갔다. 36세(1937년 9월 27일) 때의 일이다. 조부는 가솔을 이끌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울릉도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조모가 돌아가고(1923) 부친이 돌아간(1927) 후에 집안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집안을 다스렸다. 또 한 집안의 어른으로 처음에 포항 이주를 반대하였다. 조부가 돌아가자 모친이 조부의 극락왕생과 가정의 액운을 소멸하기 위하여 포항 죽림사(竹林寺)에서 49재 불공을 올리겠다고 상의하였다. 대종사는 모친의 불심이 돈독하고, 한편 그즈음 집안에 여러 액난이 있어서 조모의 불공에 동의하였다. 조부의 49재 회향재는 11월에 있었다. 모친은 아들에게 조부의 49재 회향재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자 흔쾌히 수락하고 동참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부의 열반은 대종사의 생애에 대전환을 가져다주었다. 회향재가 끝나고 대종사는 주지스님과 법담을 나누고 가겠다며 뒤에 남았다. 그런데 그 이튿날 새벽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몹시 환희하고 고무된 표정으로 귀가하였다. 대종사는 주지스님과 불법과 인생에 대하여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밤을 새우면서 토론하여 지금까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불법에 대하여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집에 돌아오자 가족에게 그 이튿날부터 일 년 동안 새벽 불공을 하겠다고 하였다. 대종사는 아마도 가까이는 자녀들의 단명과 조부의 극락왕생, 그리고 멀리는 사업과 인생에 대하여 무엇인가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려 한 것이다. 그러한 문제를 풀기 위하여 1년 새벽불공이라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찬물에 몸을 청결히 한 후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경전을 독송하고 절에 가서 희사한 후 독경과 절 등의 기도를 하고 돌아왔다. 대종사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접하고 마음이 결정되면 하고야 마는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1년 불공은 이처럼 용맹정진으로 지속되었다. 1년 불공의 회향 13일 전날 아침 아주 환희한 마음으로 일어났다. 기상 직전 꿈결에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대웅전 불전(佛前)에서 절을 하고 있는데 부처님으로부터 둥근 불덩이가 눈부시게 굴러와서 대종사의 가슴에 안겼다. 그렇게 꿈을 깨었다. 이렇게 해서 1년 새벽불공은 용맹정진으로 회향하였다. 불공의 회향  며칠 후 주지스님이 방문을 하였다. 그리고 예금통장을 내놓았다. 불공 동안 희사한 금액이 너무 많아 쓸 수가 없어서 예금해 두었다는 것이다. 대종사는 희사한 것인데 왜 그러느냐며, 불법을 위해 알아서 쓰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자라면 더 보태어 드리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주지스님은 지장보살상과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대종사가 비용을 더 보태어 대세지보살상을 조성하였다. 1년 불공 후에도 대종사는 더욱 용맹정진을 계속하였다. 불상을 조성하기로 상의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다른 상서로운 현몽(現夢)을 하였다. 대종사가 기도하기 위해 절을 찾아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 한 스님이 차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스님은 대종사 가까이 와서 차에서 내리고 대종사에게 차를 타고 올라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스님은 사라져 버리고 대종사는 차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꿈을 깨었다. 이러한 일련의 현몽이 구법 정진에 원력을 더욱 북돋우라는 뜻으로 여겼다.
 
(2) 구법순례와 용맹정진
대종사는 1년 불공을 회향한 그 이듬해(38세·1939) 정월 초이튿날 명주옷을 새로 갈아입고 형산(兄山) 절을 찾아 기도불공을 하였다. 집에 돌아올 때 새 바지의 무릎이 헐어 있었다. 그만큼 용명정진을 한 것이다. 형산 절은 형산에 있는 절이라는 말이라서 구체적으로 어느 절인지 명확하지 않다. 대종사께서 그저 형산 절에 간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형산에는 암자 규모의 절이 몇 있기는 하다. 형산은 경주시 강동면 유금리와 포항의 경계가 되는 산이다. 본래 유금 뜰과 포항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형제산으로 불렀다. 산이 가로막아 강물이 잘 흐르지 못하여 유금 뜰에 침수가 심하여지자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를 쳐서 산을 두 쪽으로 나누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남쪽 산을 형산, 북쪽 산을 제산이라 부르고, 그 강을 형산강이라 부르고 있다. 대종사는 형산 절의 정진에서 돌아온 후부터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구법의 길을 나섰다. 우선 기림사(祇林寺)를 비롯한 주위의 절과 스님들을 찾아 기도하고 법담을 나누는 것부터 하였다. 수행정진과 법담의 자세한 이야기와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실은 가려져 있다. 대종사는 구법순례를 할 때부터 사업은 지인에게 맡기고 구법정진에 마음을 쏟았다. 한번 집을 나가면 적어도 열흘 이상 지나서 돌아오는 일이 일상처럼 되었다.
 
대종사의 구법은 금주, 금연 등 개인 수행에서 시작하였다. 금연하면서 마치 친한 친구를 이별한 것처럼 섭섭하다며 인간적인 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경전을 인쇄 반포하기 시작하였다. 일과는 거의 정진, 독경 그리고 경전을 인쇄하고 반포하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법화경’을 반포하였다. 인쇄한 경전은 주로 법보시하였다. ‘법화경’을 가장 먼저 인쇄한 것을 보면 그 당시도 ‘법화경’이 가장 신심을 일으키는 경전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화경’을 비롯하여 많은 경전을 반포하였다. 훗날 교화를 하면서 설한 말씀을 감안하면 번역 경전 중에 ‘금강경’도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경전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법화경’ 외에 이름이 알려진 경이 ‘고왕관음경(高王觀音經)’이다. 모친과 스님의 권유로 ‘고왕관음경’을 인쇄하였다. 그리고 자녀를 비롯해 가족과 친지에게 지송하도록 하였다. 아들 서주(손제석·전 교육부장관)는 그 사실을 뜻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고왕관음경’은 관음보살의 영험담에 대한 일화를 품고 있는 경전이다. 중국 동위(東魏·원위)의 왕인 고환(顧歡)이 서사(書寫)한 관음보살의 영험경이라는 의미에서 ‘고왕관음경’이라 부른다. 또한 관음보살의 영험을 입어서 죽음의 위기를 면하고 연명하게 한 경전이어서 ‘연명십구관음경(延命十句觀音經)’ 또는 ‘연명관음경’ 등으로 불린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꿈속에서 받은 경이라는 뜻에서 ‘몽수경(夢受經)’이라고 더 알려져 있다. ‘연명관음경’은 10구 42자의 짧은 경전이기 때문에 외워서 암송하기 좋은 경이다. 그래서 대종사는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외워서 수지하도록 권한 것이다. 일종의 관음기도의 경전이기 때문에 후에 농림촌의 관음정진과도 인연관계가 닿아 있다. 이 경은 ‘관세음나무불’로 시작하고, ‘조념관세음(朝念觀世音) 모념관세음(暮念觀世音) 염념종심기(念念從心起) 염념불이심(念念不離心)’으로 끝을 맺는다. ‘관세음나무불’은 관세음을 염송하면 그 자체가 부처님에게 귀명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조념관세음 모념관세음’은 아침저녁으로 늘 관세음을 염송한다는 뜻이다. 또한 ‘염념종심기 염념불이심’은 순간순간의 마음이 관세음을 염송하는 마음에 일어나고, 관세음을 염송하는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관세음을 염송하는 마음은 그 자체가 본심이고 불심이다. ‘고왕관음경’을 읽으면 곧 언제 어디서나 본심과 불성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관음정진에 대한 대종사의 신심을 일러주는 일화가 있다. 대종사가 포목과 제과업을 중심으로 양돈업 등 다양한 사업을 할 때이다. 그때 제과 공장에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화재를 당하여 공장을 다 태웠는데도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 걱정을 하면서 찾았다. 그런데 대종사는 죽림사 법당에서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관음정진을 하고 있었다. 공장의 큰 화재를 당한 와중에서도 먼저 법당을 찾아서 정진한 것이다. 화재를 당하고 재산의 손실 앞에서 법당을 찾아서 자신을 추스르고 주위 사람들을 안심하게 하려고 법당에서 정진하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먼저 다스려야 그 상황을 잘 수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이즈음 대종사는 본인이 마련한 집으로 이사하였다. 포항에 이사한 지 10년 후 39세(1940) 2월 21일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여 이사하였다. 그곳이 영일군 포항읍 본정(상원동) 504번지이다. 그때까지 김두하가 제공한 포항동 집에서 10여 년간 살았다. 대종사는 29세(1930) 음력 9월에 포항으로 옮겼다.
 
호적부에는 1931년 1월 27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이사 후에 호적 정리하였을 것이다. 그 터가 포항면 포항동(남빈동) 487번지이다. 그 일대는 김두하 형제의 땅이 많이 있었다. 자택을 구해 이사한 것은 대종사의 사업 규모가 정상 궤도에 올랐기 때문이다.

4면 자료사진 형산 1.jpg

-진각종 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