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의 세계를 열다

밀교신문   
입력 : 20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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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당대종사의 수행과 진각(2)

(2) 보통학교에 입학하다
울릉도에 근대 교육기관으로서 울릉 공립 보통학교가 설립되자 대종사는 14세(1915)에 입학하였다. 울릉도에 근대 교육기관 설립은 1901년에 시작한다.
 
1901년 황성신문 2월 27일 자 잡보에 “울릉군수 배계주(裵季周) 씨가 해군인민(該郡人民)의 교육차로 학교를 설시하고 학부에 인허를 청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울릉군수 배계주가 울릉도가 울릉군으로 승격된 것을 계기로 1901년 1월 울릉도에 처음으로 근대학교를 설립하고 학부에 인허를 신청한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그 후 1908년 군수 심능익(沈能益)이 관어학교(觀於學校)를 건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교원은 조현우(趙鉉禹)와 일본인 요시다 히츠지(吉田未藏)의 2인이고, 학생 수는 12~13명이었다. 교과목은 일어·산수·한문 등 서당식으로 수업하고, 수업 연한은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정적 문제로 이듬해 1909년 휴교하였다. 관어학교가 휴교하자 관어학교를 이용하여 사립 신명학교(新明學校)를 설립하고 옥류서당(玉流書堂·사동 서당)의 훈장 김광호를 교장으로 초빙하였다. 교원은 진형호(陳衡浩)와 일본인 디카야 레이메이(高谷靈明)이었다. 교과는 예과와 본과를 두었고, 예과에는 한문·습자, 본과에는 일어·산술·체조·한문·습자 등을 가르쳤다.
 
수업 연한은 예과 1년, 본과 3년이고, 총 26명의 학생이 공부하였다. 그런데 1911년 ‘사립학교법 규칙’이 공포되자 신명학교는 울릉사립보통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고 교장은 일본인 마노(眞野威光)가 맡았다. 교과목은 종전과 같고, 학생 수는 36명이었다. 1913년 3월 13일에 울릉 사립 보통학교는 다시 울릉 보통학교로 인가되어 울릉도에서 첫 공립학교로 4월 1일 문을 열었다. 그 후 울릉도에는 일본인 전용학교, 또한 중요 지역에 공립 보통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울릉 보통학교는 1913년에 설립되었고, 대종사는 2년 후인 14세(1915)에 입학하였다. 학적부에 따르면 이름은 ‘덕상’으로 1915년 4월 2일에 입학하였다. 본적과 주거지는 울릉군 남면 옥천동이고, 생년월일은 6월 10일로 잘못 기술하고 있다. 호적은 5월 10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호자의 직업은 농업으로, 입학 전 경력으로 가주학(家住學) 천자문으로 적고 있다. 가정에서 천자문을 공부했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입학할 때 서당에서 공부한 사실을 밝히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교과목은 1~2학년 때는 조신(條身)·국어(일본어)·조선어 및 한문·산술·과학·도화(圖畵)·체조·창가 등이고, 3~4학년은 여기에 이과와 농업 초보가 들어 있다. 성적은 평균 9점(10점 만점)을 받아서 평점 갑(甲)을 받았다. 학적부에는 신장(4.56), 체중(9.50), 흉위(2.30)이며 체격 강(强)이라는 재미있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18세(1919)에 3월 25일에 졸업하였다. 따라서 보통학교 재학시절 공부를 열심히 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소년 ‘덕상’은 입학하여 6개월 만에 할머니의 반대로 학교를 쉬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학교에 가지 못한 ‘덕상’은 어머니의 농사일을 도왔다. 그런데 하루는 어머니와 밭을 매러 갔다. 어머니가 밭을 매던 중 밭매던 아이가 사라진 사실을 알았다. 잠시 일을 쉴 겸 밭 주위를 살펴보았다. 보이지 않던 아이가 밭머리에 깊은 웅덩이를 파 놓고 그 속에 들어 있었다. 깜짝 놀라서 ‘여기서 무엇 하느냐?’고 나무라듯 물었다.
 
아들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학교에 가서 공부도 못하게 하는데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여기서 죽어 버리는 것이 낫겠다”며 버티고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학교에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 사실을 할머니와 상의하여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배움에 대한 간절한 마음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하고야 마는 의지력을 볼 수 있다. 소년 ‘덕상’은 학교에 다니면서 가끔 산에 가서 귀버섯(목이버섯) 등 나물을 해다가 팔아 달걀을 사서 선생님에게 선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선물은 꼭 해가 저물어 땅거미가 져서 남의 눈에 띄지 않을 때 가져갔다. 선생님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다. 누군가가 일본 선생님께 선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때 “일본인에게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께 선물한다”는 대답을 하였다. 어릴 때부터 은혜를 생각하고 갚으려는 심성이 싹튼 것으로 보인다.
 
대종사가 탄생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사회는 실학사상과 양무사상(洋務思想) 그리고 문명개화론 등의 요인에 의하여 일어난 개화 적인 분위기 속에서 국치(國恥)의 비운을 맞게 된 시기였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에 3․1 만세 운동을 경험하였다. 소년 ‘덕상’은 아마도 이러한 서구사상과 일제의 침략에 적지 않은 영향을 입고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3) 배움의 의욕을 키우다
대종사는 울릉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에서 농사일하면서 계속 공부를 하였다. 특히 의생(醫生) 공부에 관심을 기울였다.
 
‘방약합편(方藥合編)’ 등의 의서를 읽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부친은 아들의 의생 공부를 반대했지만, 대종사는 학교 공부를 계속할 뜻을 세웠다. 그렇지만 집안 사정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때 집안에서 청년 ‘덕상’의 혼사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20세 때(1921) 18세의 배 씨 규수와 결혼하였다.
 
배씨 가문은 일찍이 울릉도에 입도(入島)하였다.
 
“고종 27(1890)년에 대구인(大邱人) 배상삼(裵尙三)을 도수(道首)로 삼아 도장(島長)을 대리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배씨 가문은 이때쯤 울릉도에 정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종 건양 원년(1896)에 배계주(裵季周)가 도감(島監)에 임명되고, 광무(光武) 4(1900)년 울릉군으로 개칭되어 군수가 되었다.
 
배계주는 광무 7(1903)년까지 군수를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로 보아서 울릉도에서 배씨 가문은 명문 부자 가문이었다. 청년 ‘덕상’의 사람됨에 신부 집안에서 결혼을 청하였다. 신부 집안에서 장롱을 맞추는 등 혼사의 성사에 매우 기뻐하였다. 대종사는 결혼 이듬해 21세(1922)에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대구로 떠난다. 결혼 7개월 만에 처가의 도움을 받아서 대구 경북중학교에 원서를 냈다. 그러나 시험 당일 설사 증상으로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였다. 다시 계성학교에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입시시험이 4월 6일이고, 입학이 4월 7일이었다.(학적부는 4월 3일)
 
신입생은 157명이었다. 동갑내기 삼촌도 따라와서 같이 학교에 다녔다. 그때가 바로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직후였으며 계성학교도 예외 없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그래서 학교의 수업은 원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계성학교 생활은 6개월밖에 하지 않았고 그해 10월 24일 퇴학을 하였다. 퇴학의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퇴학 사실을 부인에게 알리지 않고 바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집안에서는 학교가 휴업하여 퇴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학교의 교무일지에는 휴업한 사실이 없다. 아마도 후일 퇴학의 이유를 그렇게 말했을 가능성도 있다. 학교의 교육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학교의 교육에 만족감을 얻지 못해서 퇴학하였을 것이다. 삼촌도 역시 따라갔다.
 
도일(渡日)에 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부인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콩 타작을 하는데 대종사는 흰 콩을 타작하고, 일본 사람은 검은콩을 타작하였다. 꿈 이야기를 시어머니에게 하였다.
 
시어머니가 “덕상이가 일본 간다”고 대답하였다. 흰콩 검은콩의 이미지가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이 이야기로 보아서 도일의 사실을 부모님께는 알리고 부인에게는 모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 건너간 청년 ‘덕상’은 동경에서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예비학교에 다녔다. 예비학교는 정규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기관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본 생활 1년이 되던 22세(1923)에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일어났다.
 
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도쿄가 있는 관동지방에서 일어난 규모 7.9의 대지진을 말한다. 지진은 가나가와(神奈川)현에서 일어나 도쿄와 요코하마 등 관동지방을 휩쓸었다. 지진발생 후 통신이 두절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 정부는 국민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음모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이 살인 방화를 하고 있다”라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 소문은 커져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또는 “산업시설을 파괴하고 있다,” 나아가 “약탈 강간까지 하고 있다”라는 등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자 공공연히 “조선인은 죽여도 좋다”는 발언이 나왔다. 그러자 계엄군과 경찰은 조선인을 무차별 폭행하고 살해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 수가 무려 10만에 이르는 참상이 일어났다.
 
대종사가 귀국 후 가족에게 전한 사실은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저녁 후 등교 준비를 하는데 동네 아래쪽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동료들과 모여서 상황을 지켜보는데 불길이 세 집 건너까지 번져 올라왔다. 동료들과 피신하여 학교 담장 밑에 숨었고 나중에 돌아가 보니 집은 불에 타 버렸다. 그래서 이재민 수용소에 들어갔으나 경비원이 한눈을 파는 틈을 타서 탈출하였다.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 폭행과 살인을 피해서 산으로 도망갔다. 산으로 도망가는 중 삼촌이 따라오지 못하자 업고 갈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 폭행과 살상의 상황이 진정되고 식비와 여비를 요청하기 위해 고국의 집에 연락을 취하였다. 그리고 일본을 탈출하기 위하여 니가타(新潟) 항구로 갔다. 니가타는 일본 혼슈(本州)의 니가타현의 현청 소재지로 니가타현의 동북부의 동해에 면하고 있는 가장 큰 도시이다. 그때 니가타항은 북방의 나라, 그리고 태평양으로 나가는 통로였다. 청년 ‘덕상’은 귀국하느냐 아니면 하와이로 가느냐를 놓고 심적인 고민을 하게 된다. 그때 하와이로 간 사람도 많았지만 결국 귀국하였다. 이렇게 일본 유학은 천재지변과 흉흉한 지역정서 때문에 중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짧지만 일본 생활을 통하여 많은 경험을 얻었다. 후일 과학기술과 물질문명 등을 중요하게 여기고 혁신적 사고를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유학이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로 좌절되자 청년 ‘덕상’의 상실감은 매우 컸다. 귀국 후 이러한 심정을 다스리기 위하여 전국을 주유(周遊)하는 여행을 하였다. 평양 을밀대를 배경으로 삼촌과 함께 찍은 사진이 그때의 사정을 말해준다. 팔도를 돌면서 일본 생활에서 겪은 나라 잃은 설움과 배움에 대한 열망을 다독이고 새로운 삶을 고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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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정 총인 예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