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칠존이야기- 12.금강욕보살

밀교신문   
입력 : 2018-07-23  | 수정 :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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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를 쏘아 떨어뜨리는 보살

욕망의 역설이란 말이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욕망을 버려야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지만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 욕망을 버리려고 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토인비, 비스베이더, 허먼 등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허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내가 욕망을 지멸시키고자 욕망한다면 결국 모든 욕망을 다 지멸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다만 한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시켰을 뿐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역설은 열반이라 하여 모든 욕망을 없애려는 욕망 속에 포함된 실제적인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이 문제는 일찍이 불교 내에서도 논의된 적이 있음을 '잡아함경' 제21권 「바라문경'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경에 따르면 아난 존자와 어떤 바라문의 대화 중에서 “욕망에 의해 욕망을 끊는다”는 아난 존자의 말에 그 바라문이 “그렇다면 그 욕망은 끝이 없는 것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아난 존자는 예를 들어 “그대는 정사에 가야겠다는 욕망이 있었지만 정사에 도착하고 나서 그 욕망은 사라졌을 것이다”는 비유를 통하여 욕망의 역설은 성립하지 않음을 경험론적으로 밝혔다.
 
무명을 바탕으로 추구하는 욕망과 번뇌를 버리려는 욕망의 개념은 다른 것이다. 전자는 부정적 의미의 이기적 욕망으로서 탐욕과 갈애이고 후자는 이타적인 의욕, 바람, 이상, 원 등을 뜻하는 것이다. 탐욕과 갈애로써 이룩하는 것은 인연생멸의 윤회이다. 이 인연을 잘 관찰하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 없다. 또한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리되어 있는 것이 없고 계속 변화하는 속에 실체가 없다. 이렇게 알아가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열반을 추구하고자 하는 바람이기에 생멸의 욕망과 적멸의 바람은 다르다. 부처님은 본능적인 아집⋅아욕에 가담하는 쪽의 마음작용을 번뇌⋅유루 등이라 일컫고, 해탈하는 쪽에 가담하는 마음작용을 한마디로 보리심이라 칭하였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명에서 앞의 무자를 지운 명이고 지혜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 중생들에게 열반으로 지향하도록 교화하고자 하는 마음은 중생교화의 방편지혜이며, 여기에서 교화하고자 하는 서원의 적극적인 면을 살려서 이 마음도 ‘욕(欲)’이라 표현하게 된다. 이 욕망은 윤회를 야기하는 번뇌의 욕망과 다르기에 불교에서는 중생교화의 욕망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크다는 뜻의 ‘대’자를 넣어 대원, 대욕이라 하고 있다. 보현보살의 10대원, 법장비구의 48원, 지장보살의 대원 등이 그것으로 정토는 이러한 보살들의 대원으로 성취되는 국토이다. 그리고 금강계만다라 삼십칠존 가운데 금강욕보살이 이와 같은 중생교화의 대욕망을 의인화시킨 예가 된다.  
 
동방 아촉여래의 서방에 머무는 금강욕보살은 '금강정경'에 ‘일체여래가 중생들을 애락하는 자재한 지혜’라고 표현되며, 기타 여러 경전에서 ‘금강궁(弓)보살’, ‘금강염보살’, ‘마하대애보살’이라 한다. 백팔명찬에서 ‘모든 번뇌를 굴복시키는 자⋅절대적인 안락⋅금강의 활⋅금강의 화살⋅절대적인 금강’의 이름으로 그 덕이 찬탄되며 밀호는 ‘대희금강’이다. '금강정경'에서 그 출생을 밝힌 문단은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은 마라대보살삼매에서 출생한 살타가지의 금강삼마지에 들어가니, 이 이름을 일체여래의 수애락삼매라 이름한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나오자마자 저 구덕지금강자는 일체여래의 화기장을 이루고 출현하고 나서 곧 세존 대비로자나여래심에 들어가서 합하여 한 몸이 된다. 이로부터 거대한 금강의 화살을 출현하고 저 마라의 성품은 금강살타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한 까닭에 합하여 한 몸이 되고 마라대보살의 몸을 출생한다.” 
 
여기에서 금강애보살, 즉 금강욕보살은 마라대보살신과 동체로 표현되며 일체여래의 수애락삼매, 즉 중생구제를 즐겨 구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삼매에서 출생한다. 마라(māra)는 ‘장애’⋅살해하는 자⋅목숨을 빼앗는 자라고 하며, 몸과 마음을 요란케 하여 선법을 방해하고 좋은 일을 깨뜨려 수행을 방해하는 마군은 바로 마의 군졸들이다. 그 인계는 활과 화살이다. 또 마의 의미를 내관적으로 해석할 때는 중생을 괴롭히는 일체의 번뇌를 마라고 부른다. 중생이 언제나 온갖 번뇌에 견고하게 얽매이며 부처의 청정법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 보살은 활로서 이를 쏘아서 그 견고하게 얽힌 것을 순식간에 파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즉 살해를 뜻하는 마라가 밀교에 포섭되어 이기적 욕망을 철저히 파괴하고 살해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구체적으로는 욕금강보살이 금강의 활과 화살을 가지고서 아뢰야식 가운데의 온갖 번뇌의 종자를 쏘아 대원경지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 마라대보살을 동체로 하는 금강욕보살의 욕망은 개체의 이기적 욕망이 아니라, 모든 욕망의 근원인 청정한 대욕으로서, 이 대욕의 사업을 위하여 이 보살은 금강의 화살을 지니는 것이다. 
'성위경'의 다음 문장을 통해서도 금강욕보살의 역할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애대비전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금강애대비전삼마지지로부터 금강화살의 광명을 유출하여 두루 시방세계를 비추며, 일체중생을 쏘아 맞혀서 무상보리에 마음이 떠난 자를 억누른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지며,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 하기 위하여 금강욕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아축여래의 왼쪽[西] 월륜에 머문다.”
 
 여기에 등장하는 금강의 화살은 아주 강하므로 어떠한 것이라도 쏘아맞출 수 있다. 위 문장에서는 중생의 마음 가운데 불도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좁은 마음을 쏘아 맞추어 없앤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다시금 불도에 들어오게 된다. 애는 큰 욕망을 뜻하며 그것은 대비를 속성으로 한다. 금강애대비전삼마지는 큰 욕망의 대비로 전개되는 화살, 즉 적극적으로 중생의 번뇌를 제거하고자 하는 절대적인 의욕을 의미한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비슷한 표현이 보이고 있다.
 
“왼주먹에 활을 잡고 오른손에 화살을 들어 자비의 눈으로 온갖 마, 탐진치 등의 모든 번뇌를 쏜다. 이 인을 이름하여 성냄을 없애는 인계라 한다. 이른바 이 보살은 수행자들이 애락하는 바를 시여하는 까닭이다.”
이렇게 금강욕보살은 대비의 화살을 잡고, 집착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쏘아맞춘다. 중생들이 집착하는 어리석은 마음이란 인집과 법집의 2집을 말한다. 인집은 아집이라고도 하며 오온이 화합하여 성립된 몸에 언제나 한결같이 주재하는 참다운 나가 있다고 주장하는 집착을 말한다. 법집이란 객관적인 일체의 사물이나 마음의 현상이 실재하는 줄 잘못 알고 고집하는 것으로 불교 수행에 장애가 되는 그릇된 집착이다. 이 집착은 성문과 연각 등 소승의 수행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 일으키게 된다. 이들은 불교의 교리인 생사와 열반, 그리고 색⋅수⋅상⋅행⋅식의 하나하나가 모두 실재한다는 그릇된 고집 속에 빠져 도리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이러한 번뇌를 제거하는 데에 이전의 불교에서 보여주었던 수동적인 번뇌의 제거가 아니라 밀교에서는 적극적인 방편을 동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활과 화살로써 번뇌를 쏘아맞춘다는 표현은 지혜로써 번뇌를 끊어없앰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적극적 활동에 의해 스스로의 번뇌뿐만 아니라 보리심의 화살로써 일체 유정을 불러들여 불도에 머물게 하려는 금강욕보살의 의욕이 발휘되는 것이다. 
 따라서 '금강정경'에 활과 화살을 지니는 묘애금강과 상응하는 까닭에 모든 부처님을 따라서 애락하게 한다고 하며, '약출염송경'에는 금강애염의 인계로 말미암아 일체불법을 즐긴다고 그 결인의 공능을 설한다. 모두가 능동적 번뇌제거이며 중생교화로써 일체의 불보살을 환희하게 하는 불사가 된다.
 
'금강정경의결'에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여래께 봉사하므로 여래가 애락한다. 중생들이 받들어 지니므로 중생이 괴로움을 떠난다. 또한 송하여서 여래를 염애함으로 말미암아 여래가 호념하시게 된다. 중생을 염애함으로 해서 중생이 해탈한다. 이것을 염애의 지혜라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금강애보살이 일체중생에 대해 절대적 사랑을 보내는 공덕을 설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공덕과 묘용을 상징하기 위하여 보살의 성신회의 상은 살색으로 오른손에 화살을 쥐고 왼손에 올려놓고 화살을 쏘는 것과 같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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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욕보살

 

김영덕 교수/ 위덕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