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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15-잘못을 저지르다

편집부   
입력 : 2018-04-30  | 수정 : 201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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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저지르는 자의 여섯 단계

어느 날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세상의 범부들은 욕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범부들에게 가난이란 괴로움이겠지?”
제자들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가난하다면 그것보다 더 힘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재산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이자를 내겠다고 약속하고서 빚을 진다면 어떻겠는가? 그 이자 또한 범부들에게는 괴로움일 테지?”

“예, 그렇습니다. 가난한 데다 빚까지 지고, 빚을 졌는데 이자까지 물어야 하니 아주 커다란 괴로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자를 내기로 약속하고 빚을 진 가난한 사람이 제때에 이자를 갚지 못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자를 갚으라는 독촉에 시달릴 텐데, 이 역시 그 가난한 사람에게는 커다란 괴로움일 테지?”

“예, 그렇습니다. 빚을 진 것도 힘든 데 이자까지 제때 내지 못해 독촉을 당한다면 가난한 범부에게는 너무나도 큰 괴로움일 것입니다.”

“그런데 독촉을 당해도 이자를 제때 내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더욱 심한 추궁이 가해질 텐데 가난한 범부에게는 이것 또한 커다란 괴로움일 테지?”

“예, 그렇습니다. 밤낮 없이 이자를 갚으라며 위협이 가해질 테니 아주 괴로울 것입니다.”
부처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독하게 추궁을 당하면서도 이자를 갚지 못한다면 분명 그 가난한 범부는 신체에 제약을 당할 것이다. 옥에 갇히거나 의롭지 못한 이들에게 몸의 자유를 빼앗길 것인데, 이 또한 가난한 범부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일 테지?”

“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가난해서 빚을 졌는데 이자를 갚지 못해 끝내 옥에 갇히거나 신체 자유를 빼앗긴다면 그보다 더 큰 괴로움은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재산이 없음에도 돈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의 현실이 불러오는 악순환을 이렇게 차분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경을 읽다보면 세속을 떠난 부처님이 돈과 관련한 말씀을 많이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미 그 당시 인도 사회는 돈이 사람들 삶에 깊숙하게 들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하루를 다 바치고, 그렇게 인생을 보내며, 가난한 데도 돈을 써야 할 곳은 줄어들지 않으니 결국 남에게 돈을 꿔서라도 소비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 보통 사람들의 삶입니다.

지금이나 2600여 년 전이나 사람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재가불자들에게 부지런히 힘써 노력하여 정당하게 돈을 벌라고 권하십니다. 돈을 벌어야 자신과 가정이 화목해질 수 있고, 이웃과 사회에 떳떳할 수 있고, 보시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가난에서 출발한 이 법문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뜻밖에도 재물이 부족한 상태인 가난을 선함(善)의 부족함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부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렇다. 가난은 사람들에게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가난해서 이자를 약속하고 빚을 지고, 이자를 갚지 못해 독촉 당하고, 독촉을 당하면서도 이자를 갚지 못해 심한 추궁에 시달리고, 그래도 갚지 못해 끝내 자유를 빼앗기는 것은 사람들에게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선(善)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이어서 부처님의 법문이 이어지는데, 잘못을 저지르는 자가 더욱 나쁜 상태로 자신을 몰아가는 여섯 단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첫째, 선한 것에 대해 믿음이 없고, 자신이 한 행동을 잘 헤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선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성자의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입니다. 세속에서는 돈이 없는 것이 가난하지만 진리의 세계에서는 선하고 악한 것을 분별할 줄 모르고 자기 행동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이 가난입니다.

둘째, 그런데 선과 악을 분별할 줄 몰라 자신의 잘못에 부끄러움이 없고, 나아가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또한 어리석어서 어떤 것이 선인지 몰라 몸과 입과 뜻으로 잘못을 거듭 짓는다면, 이런 사람은 성자의 세계에서는 이자를 약속하고 빚을 지는 것입니다. 몸과 입과 뜻으로 악업을 짓는 것이 세속의 가난한 사람이 빚을 지는 것과도 같다는 비유가 흥미롭습니다.

셋째, 몸과 입과 뜻으로 악업을 지었다면 자신의 잘못을 얼른 반성하고 다른 이에게 고백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자신의 그런 잘못을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고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 더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자의 세계에서는 이자를 갚는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매달 이자를 갚아야 하는데 갚지 못하면 이자는 눈덩이처럼 커져만 갑니다.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고 더욱 더 잘못을 저지르고 악업을 짓게 되는 것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넷째, 그리하여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잘못을 언젠가는 벗에게 들키고 맙니다. 착한 벗이 그의 행동을 알아채고 지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자의 세계에서 독촉 당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섯째,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고 더욱 그릇된 행동을 일삼은 결과, 이런 자신을 질책하는 선량한 벗도 이제는 반갑지 않습니다. 가급적 그런 벗을 피해서 사람들이 별로 오가지 않는 곳을 다니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인적 드문 곳을 다니다 보면 떳떳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더욱 분노하고 자조하면서 마음에 사악한 생각을 품게 되며, 이런 생각은 점점 커져만 갈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자의 세계에서 추궁을 당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섯째, 행여 선량한 벗의 질책을 피해서 다닌다 하더라도 자신의 잘못에 따라오는 괴로운 결과까지 피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번 생에 그 과보를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음 생에라도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됩니다. 경전에서는 그것을 가리켜서 “지옥이나 괴로운 곳, 파멸의 경지로 떨어지며, 삼악도에 떨어져 벗어나기 어려우니 마치 삼악도의 밧줄에 묶여 자유를 잃는 것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선을 알지 못해 악업을 거듭한 자가 삼악도에 떨어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이처럼 가난한 자가 빚을 갚지 못해 끝내 속박 당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매우 깊고 높은 진리를 들려주며 해탈의 경지를 일러주지만, 그 경지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아득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은 해탈의 경지 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그저 세속 세계에서 살아온 대로 살아가는 것을 최선이라 여기지요.

초기경전인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선한 것이고 악
한 것인지를 분별하라고 촉구하고, 선한 끝을 믿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한 사람들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세속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빚과 가난으로 풀어서 법문을 하고 계십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자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얽매이다 보면 악업인 줄 알고도 저지르는 것이 우리들 범부입니다. 선업만 짓고 살자면 자신은 떳떳해서 좋은지 몰라도 가족들이 고충을 겪기도 합니다. 악업을 피할 수 없는 세속 범부들의 삶-이것이 바로 세상의 한계입니다. 부처님도 인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악업을 지은 뒤입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머물러 계실 때 승속을 가리지 않고 숱한 사람들이 악업을 저질렀습니다. 부처님은 이런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데, 이럴 때 경전의 문장을 가만히 살펴보면 뜻밖에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는 것을 가장 크게 질책하십니다.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부끄러워할 줄 알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뉘우치며 새롭게 선업을 지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면 그게 정말로 문제라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의 마음에는 어떤 덕성도 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부끄러움에도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慚)과 남 보기 부끄러움(愧)이라는 두 종류를 들고 있을까요.

지금 사회에서는 재벌3세들의 그릇된 행실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습니다. 돈 많은 집에 태어나서 온갖 권세를 누리며 사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정작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선하고 악한 것을 분별할 줄 아는 가정교육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한 개인의 잘못과 일탈 정도가 아니라 법적으로도 파장을 불러올 위법행위까지 거론되고 있습니다. 사소한 잘못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 결과, 여섯 단계를 차례로 밟아가는 저들은 어떤 괴로운 과보를 맞아들이게 될까요? “온갖 속박에서 풀려나 위없는 평화를 얻은 내가 볼 때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장애는 없다”라고 부처님도 말씀하셨는데 말이지요.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