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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멀어진 인생

이경자(소설가)   
입력 : 2004-03-29  | 수정 : 200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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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삼양동은 강북구이다. 길지 않은 굴 하나를 지나면 성북구가 된다. 그 굴을 털털 걸어가고 있는데 옆으로 새카만 세단 한 대가 지나갔다.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승용차 중에서 가장 비싼 차일 것 같았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그 차를 바라보면서 나는 갑자기 그 안에 타고 있을 사람의 인생을 생각했다. 저 사람은 자연과 멀어지는 인생을 사는구나. 이런 생각을 한 것이었다. 물론 승용차의 주인도 골프장이나 스키장 수영장 등에서 자연과 만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만나는 자연은 자연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이용한다는 것은 일방적인 행위이고 일방적인 관계다. 필요할 때 쓰고 버리면 된다. 그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그저 '물건'이다. 물건은 쓰임을 당할 때만 가치를 지닌다. 버려지면 즉각적으로 쓰레기가 되고 만다. 그런데 내가 왜 그 승용차를 타고 있을 사람이 자연과 멀어지는 인생을 살 것이라고 상상했을까. 질투와 시기심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그저 나이 든 사람의 직관으로, 사람이 너무 부자로 살면 그 삶이 당연하게 자연과 멀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부자들은 잘 걷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걷게 된다면 아마 운동을 하기 위해 일부러 걷는, 그러니까 골프장에서 걸을 것이다. 그들이 걷는 골프장의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골프를 치기 위해 꾸며놓은 '이용되는 자연'이다. 수영장이나 스키장도 마찬가지다. 자연을 이용하는 삶이니 만나는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돈을 주고 사람을 부리는 것이다. 그가 부리는 사람은 이 땅에서 함께 사는 자연스런 사람이 아니라 부리기 위해 '고용되는 사람'이다. 이용되는 자연과 고용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생은 '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은 사람답지 않다는 것과도 같다. 사람답다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자연을 잃은 삶. 왜 부자의 승용차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자연은 우리 인생의 중심이고 뿌리다. 생명의 고향인 것이다. 자연을 이용하는 삶이라는 것은 고향을 모욕하는 삶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고향을 모욕하는 것은 자기 생명을 모독하는 것이다. 자기가 사는 삶이 어느 한 가지도 모욕하지 않을 때, 그 삶이 평화와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늙어서, 이제 깨달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