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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칠존이야기 5-불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

밀교신문   
입력 : 2018-03-30  | 수정 : 201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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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성취하는 부처님

어떠한 일이 지나고 나면 대개의 사람은 지나온 일을 돌이켜보며 기대한 바에 얼마나 충족되었는가를 알게 된다. 그의 돌이킴 속에는 과거의 노력에 대한 자부심 못지않게 반성이나 후회가 따라온다. 혹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때 그 일을 성취하지 못하여서 그에 들어간 노력은 정말 쓸모없는 헛된 일이었다”고. 이런 생각이 들게 되면 쓸데없이 낭비한 노력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앞으로는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자각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과 달리 우리는 어떠한 일에 맞닥뜨릴 때 이것을 성취할 수 있을지, 또 실패하여 헛된 일이 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거듭 실패를 반복하는 가운데 지혜가 생겨나서 점점 그 실패의 횟수가 줄어들지언정 완전한 성취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정말 완전한 성취는 어려운 것인가!

우리는 이 방면의 지혜를 금강계오불 가운데 ‘불공성취여래’에게서 구해보기로 하자. 불공성취는 ‘아모가싣디(Amogha-siddhi)’라 음역하고 ‘불공대모니’라고도 의역한다. 이 여래의 명칭에서 불공이라 함은 그 완성이 공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나타내지만, 다시 말하면 반드시 성취하는 것이란 의미를 지닌다. 일체의 번뇌를 끊어 없애고 중생교화의 사업을 원만히 성취해서 헛됨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에 중생 가운데 교화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중생이 있다면 헛된 일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하듯이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어떠한 경로와 방법으로든 교화에 임하는 것은 완전한 성공의 가능성을 가지고 행하는 사업이 된다. ‘불공성취여래’는 바로 이렇게 절대로 헛되지 않은 중생교화사업을 펼치는 부처님이다.

사방사불의 하나로서 금강계만다라의 북방 월륜에 머무는 불공성취여래는 ‘석가여래’, 그리고 태장만다라의 ‘천고뢰음여래’와 동체이며 근본서원을 같이 한다. 불공성취불이 석가여래와 동체이면, 여기에서 굳이 이 부처의 유래에 대하여 살필 필요는 없다. 그것은 초기의 ‘아함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불교경전이 주존을 석가모니로 하고 있으며 그 유래가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태장만다라에서 석가여래를 ‘천고뢰음여래’라고 하는 것은 석가여래의 설법을 천계에 있는 북이 저절로 울려서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보통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후라고 하는 것은 백수의 왕인 사자가 모든 짐승을 제압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논설이 모든 외도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땅에서 울리는 사자후보다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천고뢰음은 보다 강조된 표현으로서 중생들에게 벅찬 감동을 주어서 불도로 이끈다는 설법에 의한 중생교화 활동을 상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공성취여래’의 활동성이 강조되는 것은 불공성취불이 대일여래의 성소작지(成所作智)를 인격화한 존으로서 사업성취의 덕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성소작지란 온갖 행위를 지어 행하는 우리들의 눈·귀·코·혀·몸으로 행하는 감각적인 모든 인식을 돌려서 얻은 지혜이다. 이 지혜는 십지 이전의 보살과 이승, 범부 등을 위하여 시방에서 삼업으로 여러 가지 변화하는 일을 보여 각기 이로움을 얻게 하는 지혜로서 석가모니불이 출세하여 중생을 교화하신 것이 바로 성소작지의 실현인 것이다. 중생들로 하여금 보고 듣고 느끼고 알게 하는 사업은 현실적으로 중생들과 똑같은 행위이지만 불공성취란 명칭이 말해주듯이 그 완성은 공(空)에 지나지 않는 것이면서도 중생들을 위한 감화가 반드시 성취하는 것이란 의미를 지닌다. 곧 여래의 무한한 활동과 공덕을 구체적인 가르침을 통해 나타내는 부처로서 이로 인해 일체의 번뇌를 단멸하고 사업을 원만성취해서 헛됨이 없기 때문에 ‘불공성취여래’라고 한다.

이와 같은 양상을 ‘금강정경’에서는 비로자나여래가 가장 뛰어난 갖가지의 활동을 성취하는 삼매에 들어 어깨위로부터 다섯 가지 색의 광명을 내어 북방의 한량없는 세계를 비춘다고 불공성취여래의 활동과 공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엄경’의 <여래현상품>에서 설하는 것처럼 여래가 각종 다양한 방법으로서 광대한 여래 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무한한 감동을 주어 신심을 구족하게 하고 불도로 이끌어 들여 성취하게끔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밀호를 실지금강, 또는 성취금강이라고도 하며, ‘성위경’에는 불공성취불의 가지에 의하여 모든 불사와 유정들을 위해서 행하는 이로운 일을 모두 다 성취하는 불공성취불의 묘용을 설하고 있다.
그 묘용은 인계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불공성취불이 결하는 시무외인은 설법을 통하여 중생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과 깨달음을 향해서 정진하게 하는 활동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이 인계를 두려움이 없다는 뜻의 무포외인이라고도 하는데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이 여래의 인이 무포외인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어떤 인연으로써 무포외라 이름하는가 하면 네 가지 뜻을 갖추었으므로 무포외라 부른다. 첫째는 중앙의 비로자나여래가 무명의 암흑을 멸해서 반야바라밀 등의 다함없는 허공계를 꿰뚫는 광명을 출생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동방의 부동여래가 온갖 비나야가와 악마, 귀신 등을 굴복시켜 모두 꼼짝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남방의 보생여래가 빈곤과 궁핍을 제거하여 천계의 궁전, 천계의 음식, 천계의 의복, 천계의 음악을 보시하여 모두 다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서방 무량수여래가 수행자에게 삼매의 큰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시방허공이 한량없고 다함없음과 같고, 또한 중생이 한량없고 다함없음과 같으며, 역시 번뇌가 한량없고 다함없음과 같아서 이와 같이 유가행자의 삼매의 큰 즐거움도 역시 한량없고 다함없다. 이와 같이 네 가지 뜻을 구족하고 원만케 하는 것이다.”

즉 오불에서 앞의 네 분 부처님의 활동이 다섯 번째 불공성취여래의 활동에 의해서 구족하고 원만하게 되는 것이다. ‘대일경’에 보리심을 인으로 하고 대비를 근으로 하며 방편을 구경이라고 하였듯이 금강계만다라의 오불이 출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설법을 통해서 중생이 가지고 있는 생사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을 포함한 모든 번뇌를 제거하여 깨달음에 이르도록 함에 있다. 모든 번뇌를 제거함이란 바로 열반의 성취이며,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므로, 불공성취여래는 깨달음으로 향해 나아가는 활동을 통하여 마음에 어떠한 공포도 없는 자재를 성취하도록 하는 최상의 행위를 보인다.

삼매야회에서 보여지는 이 여래의 삼매야형은 오고저 위에 갈마저가 있는 형태이다. ‘오고저’는 좌우의 오고(五鈷)를 통해서 부처와 중생의 오지(五智)가 본래 하나임을 나타내며, 갈마저는 현재 진각종의 심인당 난간에서 보여지는 형태로 열십자[十字]로 된 금강저이다. 십자는 사방으로 확산되는 구조이기에 갈마저가 상징하는 것은 여래의 활동이 중생을 향해서 빛이 사방으로 퍼지듯 무한히 발산되는 모습이다.

불공성취여래가 속한 갈마부는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불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일체의 교화사업을 성취하는 것을 담당한다. 이것을 ‘삼무진장엄(三無盡莊嚴)’이라 하는데 신·구·의의 삼밀활동에 의해 제각기 역량[業]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이상적인 세계를 창조하겠다는 서원이다.

그 서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북방 불공성취불은 일체 사업성취의 활동을 나타내는 네 보살을 사방에 시현한다. 즉 앞에는 ‘금강업보살’, 오른쪽은 ‘금강호보살’, 왼쪽은 ‘금강아보살’, 뒤쪽은 ‘금강권보살’ 등 네 보살을 둔다. 이들 갈마부의 네 보살은 주존인 불공성취불의 성격에 따라 일체의 사업성취의 덕을 관장하며, 중생에 대해 끊임없이 일체의 사업을 이루고 성취시킴을 나타낸다.

이 여래의 좌에 대해서는 ‘약출염송경’에 “그 북방에는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은 가루라좌가 있는데 불공성취불이 그 위에 앉는다고 관해야 한다”라고, 불공성취불의 방위와 자리를 알려주고 있다. 가루라는 하늘을 나는 새로 무한한 자유의 활동을 의미한다. ‘금강정경의결’에서는 “이 새의 위력이 사대해에 머무는 모든 용을 항복시키므로 불공업왕(不空業王)은 이로써 자리를 삼아 지혜의 활용을 나타낸다”라고 하여 불공성취여래의 자리를 가루라로 삼은 근거를 보이고 있다.

실로 다함없는 중생계를 교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으나, 불공성취여래와 같은 지혜와 능력으로 임할 때 중생 모두를 성불케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또는 아직 그러한 능력을 갖지 못한 우리 중생들일지라도 우리가 행하는 일체의 활동에서 중생교화를 염원하며, 그 일체의 공덕을 중생교화에 회향코자 한다면, 그 모든 활동이 최상의 가치를 부여받게 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김영덕/위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