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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제 정사 알기쉬운 교리문답 70

편집부   
입력 : 2018-03-30  | 수정 : 2018-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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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국가불사의 유래나 의미에 대해 알려주세요.

요즘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라는 말이 살짝 유행인 것 같은데, 실제로 나라를 구했던 영웅 중에 명랑(明朗)스님을 능가하는 분이 없어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 8년(668), 당나라군이 신라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남은 군사를 백제에 머물게 하고 장차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했어요. 다행히 정보를 미리 입수한 왕이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하자, 한 신하가 용궁에서 비법을 배워온 승려라며 명랑을 추천했던 겁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등용된 명랑은 경주 낭산(狼山)의 남쪽 신유림(神遊林)이란 곳에 정식 도량을 개설하도록 건의했는데, 때마침 사자(使者)가 달려와 당의 수군이 이미 한반도 인근 해상을 순회하고 있음을 알린 거예요. 이에 명랑은 급한 대로 오색 비단을 써서 임시로 절을 짓고 풀〔草〕을 엮어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밀단(密壇)에 봉안하여 유가명승(瑜伽名僧) 12명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행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놀랍게도 무려 50만 대군을 태운 당나라 배들이 정주(貞州) 인근 해상에서 격랑에 휩쓸려 침몰했고, 이듬해(671)에도 5만의 대군이 침입했는데 역시 같은 비법으로 인해 모두 수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두루는 원래 산스크리트어 ‘Mudra’의 음사(音寫)이며, 중국 동진(東晉) 시대에 뜻으로 번역한 말이 ‘신인(神印)’이에요. 오방의 신상이란 일정한 규격의 둥근 나무 위에 오방신왕(五方神王)의 이름을 써서 만든 일종의 재래식 신상(神像)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밀교의 이러한 상징적 도구를 삼매야형(三昧耶形)이라고 합니다. 일종의 초기밀교적 공감주술이 이 문두루비법의 근간인 듯한데, 이를테면 비슷한 것끼리는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식이지요.

문무왕 19년(679), 삼국통일과 나당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명랑이 종전에 문두루법을 행했던 신유림의 임시도량 터에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새로이 창건됩니다. 사천왕사는 국가적으로 관리된 사원이기도 했고, 신라불교에 있어 그 사격(寺格)이 가장 높았다고 해요. 최근 들어 경주시 배반동 소재의 낭산 아래턱에 폐사지로 남아 있던 사천왕사터가 발굴되면서 수차례에 걸친 조사 끝에 조금씩 그 면모가 드러나고 있는데, 특히 최근에는 파편 조각들을 복원한 녹유신장상이 100년 만에 공개되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어요.

요컨대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성과를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사찰의 전체 윤곽은 중앙의 금당을 중심으로 전방 동서의 탑과 후방 동서의 단석(壇石)이 오방신(五方神)의 상징적 표현으로써 배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특히 후방에는 각각 지름과 깊이가 약 20Cm를 웃도는 구멍이 뚫린 12개의 초석(礎石)이 동서 대칭의 형태로 총 24개가 남아 있는데, 이는 12명의 유가명승에 대응하는 상징적 조형물임이 확실하다는 거예요. 이처럼 명랑의 문두루비법은 일촉즉발의 전시 상황에서 사태를 일거에 호전시킨 진호국가불사의 일례로서 1,3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가히 인간의 지성으로는 풀 수 없는 불가사의함을 사천왕사터에 전하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통일이 가까워진 이 시점에, 진호국가불사의 참뜻을 되새겨 봅니다.

“진호국가(鎭護國家) 서원(誓願)으로 자기 성불하기 위해 식재(息災)하고 증익(增益)하고 항복(降伏)받고 경애(敬愛)하니 국민 모두 안락(安樂)하고 국토 모두 성불한다.”(실행론 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