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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 (12) 보살로 살다

편집부   
입력 : 2018-03-13  | 수정 : 2018-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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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눈까지 내어준 사리불 존자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과 다른 이의 행복까지 챙기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앞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나 하나 살기에도 팍팍한 사바세계에서 남의 일까지 신경 쓰며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불자로 산다는 것은 뒤의 경우입니다. 다른 이의 행복까지 챙기며, 아니, 다른 이의 행복을 먼저 챙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자기 행복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목적은 부처가 되는 일입니다. 부처란 완성된 존재입니다. 즉 생명체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경지가 부처의 경지입니다. 부처가 되고 싶다고 마음을 낸 사람이 보살입니다. 보살이 절에 다니는 아줌마를 가리키는 말이 아님은 불자라면 누구나 압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부처’가 되기 전까지 보살이었습니다. 보살로 살아온 세월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룸비니동산에서 마야부인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나기 이전, 또 그 이전, 그 이전…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을 나고 죽으면서 그때마다 보살로 살다 보살로 죽었습니다. 그것을 ‘세세생생’이라고 말합니다. 아예 유전자 정보에 보살로서 살아가게끔 되어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불자가 된다는 것은 나도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되겠다는 뜻이며, 그것은 다시 말해서 보살로서 살고 보살로서 죽겠다는 것입니다. 보살로서 살아가는 것을 보살의 길을 걷는다고 표현합니다. 보살도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중생으로 살아가지 않고 보살로 살아가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불자입니다. 보살로 살겠다고 맹세한 것을 발심이라고 합니다. 발심이란 불교를 전혀 모르고 살던 사람이 절에 처음 와서 부처님 가르침을 만난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절에 옵니다.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에게 기도하면 가족이 건강해지고 아이가 좋은 대학에 붙고 대기업에 취직하고 사업이 번창하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좋은 세상에 가시리라는 바람으로 절에 옵니다.

그런데 대승경전을 읽어보면 발심이란 것은 처음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복을 구하던 사람이 차츰 부처가 되어 세상의 빛이 되겠노라고 크게 전환하게 되는 그 시점, 바로 그것이 발심의 정확한 뜻입니다. 내 행복만을 바라던 사람이 남의 행복까지 바라고, 남의 행복을 먼저 바라게 됩니다. 이게 바로 중생에서 보살로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중생에서 보살이 될 때, 그렇게 살겠다고 강하게 마음을 내는 바로 이것이 발심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삶이 편할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보살로 살겠다고 기특한 생각을 하고 발심했지만 세상이 이런 나를 알아봐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내가 보살로 살겠다고 발심했건 하지 않았건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보살로 살겠다며 내 욕심을 챙기지 않으니 이런 내게 다가와 자기 잇속을 챙깁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보살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부처의 경지가 심오하고 어렵기 때문이기 보다 보살로 살아가는 내내 세상의 온갖 중생을 겪으면서도 그 마음이 변치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살로 살겠다고 기특하게 생각했다가 세상의 온갖 간사한 중생을 만났을 때 그만 그 마음이 꺾일 때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리불 존자입니다. 초기경전에서 사리불 존자는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입니다. 부처님에 버금가는 분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아라한은 그저 부처님이 되기 이전 낮은 단계의 성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군가 열심히 수행해서 아라한이 되었을 때 ‘이제 난 됐다. 더 이상 내가 수행해야 할 것들은 없다. 나는 이제 할 일이 없다’라고 생각하고서 “이제 끝!”하고 외친다면 그것을 소승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내 번뇌를 없앴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중생들이 있다. 저들도 번뇌를 없애야 한다. 그래야 저들도 지금 내가 만끽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저들이 행복해야만 나도 행복하다. 그러니 지금의 이 경지는 끝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서 크게 마음을 낼 때, 즉 발심할 때 그것이 대승불교의 시작입니다.

아라한인 사리불 존자는 바로 이렇게 보살로 살겠다고 다시 마음을 내야 합니다. 이것이 대승불교 정신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사리불 존자를 자주 등장시킵니다. 그가 새롭게 발심했다, 그가 아라한 경지에 안주하고 말았다 …라며 역사상 불교인물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 말고 가장 훌륭한 분을 ‘괴롭힙니다’. 이것은 불교가 뜻을 두고 있는 경지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자기 수행, 자기완성에 머물지 말고 세상을 위해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사리불 존자가 어떻게 보살로서 살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들려주는 이야기를 만나봅시다.

사리불은 세세생생 윤회를 거듭해오면서 쉬지 않고 보살도를 행했습니다. 이것도 초기경전과 사뭇 다른 내용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사리불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경지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대승경전은 다릅니다. 부처가 되는 그날까지 나고 죽는 일을 반복합니다. 단, 중생으로서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발심한 보살로서 윤회하는 것입니다.

<대지도론> 제12권에 따르면 사리불 존자는 60겁 동안 보시행을 해왔다고 합니다. 보시를 한다는 것은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런 행동이 부처가 되는 데에 공덕이 됩니다. 마치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가 식량과 여비를 단단히 챙기듯이 부처가 되기까지 보살의 식량과 여비가 바로 이런 보시행과 같은 공덕입니다. 그 오랜 세월 윤회를 거듭해오면서 사리불은 보시행을 쉬지 않았습니다.

사리불의 보시행은 순탄해보였습니다. 이렇게 보살로서 공덕을 쌓다보면 부처가 되는 일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났습니다.
추레하기 짝이 없는 거지가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사리불에게 다가와서 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제게 당신의 눈을 주십시오.”
사리불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보시행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멀쩡한 자기 눈까지 내줘야 한다는 걸까요? 사리불은 망설이다 정중하게 거절했는데 거지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남이 원하는 것은 다 준다는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눈을 갖고 싶습니다. 다른 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리불은 아차 싶었습니다. 보살로 살겠다고 발심하고 보시를 하겠다고 맹세해놓고는 지금 망설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한쪽 눈을 빼내어 거지의 손에 올려놓았습니다. 이렇게 자기 육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일은 거룩한 희생입니다. 남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일입니다. 게다가 사리불의 행동은 아낌없는 베풂입니다. 보답을 바라지도 않고 그저 상대방이 행복해지면 그만이고, 이런 일들을 거듭해서 부처가 되겠다는 바람으로 이런 일을 합니다.

그런데 거지는 사리불의 이 거룩한 자기희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기 손바닥에 놓인 사리불 눈알을 냄새 맡았더니 대뜸 욕설과 함께 바닥에 내팽개쳤습니다.
“이런, 제기랄. 역겨워죽겠네. 별 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냄새나고 더러운 걸 뭘 그리 아껴서 주지 않으려 했단 말이야!”
거지는 흙바닥에 내팽개쳐진 사리불의 눈동자에 침을 뱉고 발로 짓이겼습니다. 그 눈동자 주인 앞에서 이런 짓을 하고 난 뒤 떠나가 버렸습니다.
아라한이 되었으면 자기수행은 이미 완성됐고, 자기공부도 마쳤습니다. 그런 아라한 사리불이 기꺼이 보살로 살겠다고 마음을 냈고 중생의 행복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데, 자신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세상은 이토록 무자비하고 염치가 없고 잔인합니다.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렸던 사리불의 마음은 닫혔습니다.
이런 중생까지 행복하게 해줘야 한단 말인가?
받고도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데 내가 전생에 무슨 큰 빚을 졌다고 그를 위해 베풀어야 하는가?
내가 이런 사람까지 구제해야 할까? 조용히 내 번뇌 없애는데 매진해서 생사를 벗어나느니만 못하겠구나.

보살로 살겠다던 사리불은 그만 소승으로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물론 법화경과 같은 대승경전에서는 사리불도 무사히 성불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그 길은 험난합니다. 부처님의 가장 지혜로운 제자 사리불 존자마저도 몇 번이나 주저앉을 만큼 그 길은 고됩니다. 그러나 불자라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지금은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이 최우선이라고 해도 세상이 행복해야 나와 내 가족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걸 안다면 세상의 행복을 먼저 챙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야 하고, 그 길뿐이라는 걸 안다면, 당신은 지금 보살입니다.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