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칠존이야기-3.보생여래

밀교신문   
입력 : 2018-02-26  | 수정 : 2019-04-10
+ -

공덕의 보배로 장엄한 부처님

요즈음 같이 오랫동안 불경기에 시달리다 보면 누군가 우리에게 재물을 듬뿍 가져다주는 꿈이라도 꾸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여기 다양한 성격을 지닌 금강계 삼십칠존 가운데 재보의 성격을 지닌 부처님이 계시다. 바로 보생여래로서 온갖 보배를 쏟아내는 마니보처럼 무한한 복덕으로 가난에 허덕이는 일체중생의 갈망을 성취시키신다.

보생여래는 대일여래의 평등성지를 담당하며 금강보·금강광·금강당·금강소의 네 보살을 거느리고 일체 재물과 보배를 맡아 중생들에게 평등한 가르침을 펴는 여래이다. 이렇듯 보배를 생겨나게 한다는 의미로 보생여래(Ratna-saṃbhava-tathāgata)라 하는데, 또는 마니주를 높은 장대에 매달아 보는 이로 하여금 바라는 바를 성취케 한다는 보배깃발의 부처님, 즉 보당불이라고도 하며, 보배와 같은 훌륭한 모습의 부처님으로 보상불, 또는 보배와 같이 뛰어난 부처님이라는 뜻의 보승여래 등으로 호칭된다. 공통되는 점은 마니보배가 상징하는 최고의 복덕과 공덕으로써 모든 중생들의 소원과 수행을 원만하게 성취시킨다고 하는 점이다. 일체중생의 소원을 원만하게 성취시키고 삼계법왕의 관정을 수여하여 행자로 하여금 평등하게 하므로 밀호를 평등금강, 또는 대복금강이라 한다. 삼매야형은 보배구슬이며 종자는 ja, trāh이다.

보생여래가 무한한 재보를 베푸는 것은 이 여래가 여원인을 결하고 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서는 보생여래가 여원인을 결한 다섯 손가락 사이로부터 여의주를 비처럼 뿌리는데, 이 여의주는 천상의 의복ㆍ천상의 묘한 감로ㆍ천상의 묘한 음악ㆍ천상의 보배궁전을 비 뿌리고, 나아가 중생의 온갖 좋아하는 바를 원만하게 한다고 한다.

이 여원인은 보배를 베풀어 중생들의 물질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뿐만 아니라 보리심을 발하여 모든 공덕을 중생들에게 베푼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따라서 이 인을 결하는 보생여래는 사람이나 자연, 각각의 사물 속에 숨겨져 있는 불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용을 갖게 된다. 또한, 지혜와 자비의 복덕을 모아서 몸을 장엄하게 하기 때문에 보생여래를 ‘공덕장엄취신보생불’이라 하고, 이 보배를 가지고 온갖 공덕을 만족시키고 불타의 위에 오르게끔 관정을 주기 때문에 보생여래의 지혜를 관정지라 한다.

관정이란 밀교의 법을 전하기 위해 관정을 받는 자의 머리와 이마 위에 물을 흘리는 것이다.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지혜의 물을 붓는 것은 여래의 지혜를 모두 이어받는다는 것을 상징한다. 관정을 통해서 부처님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며 나아가 부처님의 위를 계승할 자격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중생들 모두가 보배와 같은 여래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보리심론’에서는 일체중생이 본래부터 금강의 성품을 갖추고 있는 보살이지만 탐진치의 번뇌 때문에 얽매여서 그 불성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한다. 중생들에게는 나면서부터 이와 같은 여래장성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으므로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각성시키는 것이 바로 보생여래의 관정지로서 중생들에게 갖추어진 그 무엇보다 귀중한 보배와 같은 불성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정말 가치 있는 보배란 물질적으로 부귀와 풍요를 가져다주는 금과 은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지금 당장 보배로 인하여 현실적인 가난을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그 재물이 영원한 행복과 안락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없으면 갖고 싶고, 가지면 더 갖고 싶은 것이 중생의 욕심이다. 그 욕심은 끝나는 데가 없으므로 욕망의 충족 또한 끝날 줄을 모른다. 물질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신적 행복이다. 재물의 유무와 관계없이 일체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정신만이 일체의 고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된다. 그러므로 중생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현실적인 보배라면 보배와 같은 덕성의 발견은 더욱 절실하다 아니할 수 없다. 보생여래의 보배는 사실상 이러한 출세간적인 재보에 속하는 것이다.

또한, 분별하는 중생의 마음으로 일체를 본다면 현실적인 풍요와 가난이 눈에 띄겠지만 보생여래의 눈으로 볼 때 일체는 평등한 것이다. 수행자가 부처의 마음을 체득하여 스스로에게 부처와 같은 무한한 보배 같은 성품이 있음을 알아채고 그 자체로 풍부함을 만끽한다면, 그때 더 이상의 보배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보생여래는 이러한 보배가 원래부터 중생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아는 지혜를 갖추고 계신다. 그래서 보생여래는 금강계만다라에서 비로자나여래의 평등성지를 나타낸다. 평등성지는 여래와 중생의 본질적인 평등의 세계를 여는 지혜이다. 수행자가 부처의 마음을 체득하여 무한한 보배 같은 성품을 드러내고, 원만한 인간성이 형성된 것을 보이는 지혜이다.

이처럼 모두가 보배의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평등하며 누구나 무한히 베푸는 보생여래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건만 중생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아간다. 세상이라는 것이 넓은 것 같지만, 중생들은 자기 하나만의 삶인 닫혀지고 비좁은 곳에 갇혀 있다. 나 하나의 삶 가운데에서 탄생과 죽음, 생겨남과 사라짐, 젊음과 늙음, 미움과 사랑 등 여러 가지 구조를 절대화시켜 버리는 것이 중생의 삶이다. 이러한 차별의 견해는 모든 것을 자기와 남으로 나누어보는 분별의 견해에 말미암는다. 실제로 온갖 사물들은 따로따로 개별화하거나 특성화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물들이 개별ㆍ특성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려고 한다. 개별ㆍ특성화시키기 때문에 사물들이 분별되어 존재하게 되며 이어서 중생 삶의 변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서 모든 사물을 개별·특성화시키는 데에서 떠나면 중생들의 삶 자체가 모두 연결된 하나로서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준다는 자비의 열린 세계가 펼쳐진다. 그런 관계 속에는 나라던가 남이라는 주객의 분별이 존재할 수 없다. 남이니 나이니 하는 차별심을 떠나 일체 모든 법과 자기나 다른 유정들을 반연하여 모두가 평등한 성품임을 관찰하고 대자대비심을 일으키며, 중생들을 위하여 가지가지로 교화하여 이익하게 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니 이러한 지혜가 바로 평등성지이다. 그래서 이 지혜를 모든 중생을 널리 제도하는 지혜라고 한다. 무아에서 노닐기 때문에 평등하게 포섭하지 못할 것이 없고 모두가 한 몸이라는 지혜로서 한량없는 중생을 바른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밀교가 다른 가르침과 구별되는 특징이 성립한다. 보통 여래장이라는 개념은 ‘보성론’ 등에서 설하는 것으로 여래장의 객진번뇌를 떠나야만 일체유정이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본래부터 갖추고 있던 공성으로서의 여래장이 발현됨에 의해 일체유정은 무명에 의해 본성을 덮었던 어리석음에서 구제되어 여래가 된다. 여래장의 법성은 공성이다. 그 공성을 발현함으로써 여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밀교에서는 객진번뇌를 떠난 공성의 체득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비밀궤’에 “나는 응당 금강살타의 대용맹심을 발하리라. 일체유정은 모두 여래장성을 갖추고 있으며, 보현보살이 일체유정에 두루한 까닭이니라. 나는 일체중생이 금강살타의 경지를 증득하게 하겠노라.”고 하는 것처럼 밀교의 수행자가 큰 용맹심을 일으켜 일체중생을 구제하고자 함에는 일체중생 누구나 여래장성을 갖추고 있다는 가능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의 보살로 표현되는 보현보살의 활동적인 형상을 지닌 방편의 화신을 나투어 누구나 성불할 가능성이 있음을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유정 자신의 80종호로 꾸며진 비로자나불의 화신으로서 일체 불보살의 형상을 설한다.

보생여래의 형상에 대해서는 금강계만다라의 회상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성신회에서는 온몸이 황금색이고 왼손은 주먹을 쥐어 배꼽 아래에 두고 오른손은 밖을 향해 펴고 있는데, 무명지와 소지는 약간 구부리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펴서 여원인을 결하고 있으며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이 보생불의 형상은 태장만다라의 동방 보당불, 또는 개부화왕불, 시아귀의궤의 보승여래, 구발염구경의 다보여래, 이취경의 일체삼계주여래와 동체라고 여겨졌다. ‘약출염송경’에는 그 남방에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은 마좌(馬座)가 있다.

보생불이 그 위에 앉는다고 관해야 한다고 하여 보생불의 방향과 자리를 설명하고 있다. 말이란 일천(日天)이 타는 동물로 빛과 지혜를 순식간에 수여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또한, 모든 세간에서 존귀하고 길상한 것으로 말보다 앞서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부처를 황색으로 표현하는 것은 지ㆍ수ㆍ화ㆍ풍ㆍ공의 5대 중에서 지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인데, 이것은 대지가 식물을 성장시키고, 온갖 금ㆍ은ㆍ보석을 내장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3.jpg
보생여래

 

김영덕 교수/위덕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