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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허물

이경자   
입력 : 2004-02-23  | 수정 : 200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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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없던 버릇 하나가 새로 생겼다. 외출했다 돌아오거나 집을 나가려고 할 때 늘 사진 몇 장을 들여다본다. 그 사진은 거의 27년 이상 된 사진들이다. 값이 싼 사진기로 전문가 같은 감각이 전혀 없는 누군가가 찍었다. 사진 두 장은 각각 아이들이 아직 걷지도 못할 때 내가 누운 채 두 팔로 한껏 들어올렸거나 발등에 올려놓고 둥기둥기 하는 장면들이다. 두 사진의 공통점은 세상에 나온 지 일년도 안 된 딸들과 내가 '눈을 맞췄다'는 것이다. 눈을 맞추고 너무도 행복해 한다는 것이다. 아이와 엄마가 눈을 맞췄다는 것은 전 생명이 합일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장은 큰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고 둘째가 아기일 때, 내가 앞마당에 만든 소박한 꽃밭의 장미 더미 사이에서 두 아이와 함께 웃으며 찍었다. 내가 이런 사진을 사진첩에서 골라낸 것은 왜일까. 왜 그런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위안을 받을까. 이렇게 행복한 적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마치 재만 남은 화로에서 재를 뒤적여 불씨를 찾으려는 것처럼. 시간은 멈춘 적이 없고 끝없이 흐르는 것인데 내가 붙잡고 싶은 시간, 되살리고 싶은 시간의 흔적이 거기 있어서일까. 하지만 그 행복한 사진보다 찍히지 못한 많은 장면들, 찍어두지 않으려 했던 순간들이 내 진짜 인생일지 모른다. 그 아이들이 어릴 때, 나는 늘 아이들이 어서 커서 나를 더 이상 찾지 않을 때가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아이가 혼자 나가 놀다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는 엄마가 늘 아이와 있어줘야 했다. 아니면 아이를 보아주는 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데 나는 소설가였다. 늘 소설이 쓰고 싶었다. 하지만 소설은 잠깐 짬을 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원고료를 타서 아이들의 예쁜 옷도 사고 아이가 좋아하는 맛있는 것도 사고 싶었다. 소설가 엄마인 내 인생에서 아이들과 글쓰기가 언제나 충돌했다. 그 충돌의 와중에 잠깐 그런 행복한 시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를 위로하고 넉넉하게 하는 그 사진을 들여다보며 내 불행을 확인한다. 아이는 늘 낳을 수도 없다. 아이의 성장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도 없는 생명체다. 그런데 왜 엄마 노릇하는 시간을 훔치려고 그렇게 애를 썼었던지, 그렇게 해서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던지, 그게 결국 나의 박복함이라는 걸 왜 몰랐던가, 이제 참 후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