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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할? 누구를 위해 기도 할 것인가?

편집부   
입력 : 2017-05-16  | 수정 : 2017-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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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9대대선(5월9일)이 코앞에 다가왔다. 요즘처럼 성철스님에 대한 일화가 자주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이 어지러운 세상에 그가 조용히 던지는 사자후가 아닐까 생각되어졌기 때문이다.

어느날 교회신자와 목사님이 성철스님을 찾아와 “스님, 우리는 누구를 위해 기도를 해야 됩니까?”라고 질문을 한다. 성철스님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청중를 감화시킨다. “나를 욕하고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세요.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을 가장 많이 욕하고 비방하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세요.”

성철스님의 이 말씀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현대인의 내면속에 도사리고 있는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지고 무관심해지는 일상에 경종을 울리는 듯 보인다. 언제 타인의 고통이 곧 나의 아픔이 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진각교전 진호국가편에 보면 “이 세간에 일체 재난 모두 소멸해야 함은 개인이나 국가거나 아니하면 안 될지니 자기 일신 안락 위해 기원함은 중생이요, 일체 봉사하기 위해 자기 안전 얻는 것은 이것이 곧 불도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우주와 국가, 사회와 개인이 결코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할 수 없듯이, 서로 얽히고 설킨 상호 연관되고 융합된 한 덩어리의 세계로 본다면 자아와 타자 사이에 무슨 분별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기도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자명한 일이다. 자신보다는 타인을 향해 있고, 가족보다는 사회에 헌신적이며, 국가보다는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삶의 태도와 자세가 견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목표와 꿈을 가지고, 어떤 권력을 행사하고 자리에 오른다. 그 누구도 장난으로 정치를 하고, 장난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장난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다만 그 꿈과 목표가 얼마나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어떤 역사, 사회, 철학적 맥락과 맞닿아 있고 어떤 방향을 지향할 것인가에 관건이 달려 있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미움 받을 용기2」에서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때만 자기중심에서 해방될 수 있고, 타인을 사랑할 때만 자립할 수 있으며, 타인을 사랑할 때만 자기의 집착에서 벗어나 ‘사회에 대한 관심’과 ‘타인에 대한 관심’에 귀 기울이며, 타인을 사랑할 때만 공동체 감각에 도달 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날 “세계 평화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청년의 질문에 “집에 돌아가서 먼저 가족부터 사랑해 주세요.”라는 테레사 수녀의 대답은 그래서 더 흥미롭다. 이른바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어떤 거대한 구호나 이념따위의 거창한 그 무엇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작은 관심이, 자아의 집착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한 작은 시선과 관심으로부터 시작되는 일 일지도 모른다.

브라이언 보이드의 「이야기의 기원」이란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치 수용소에서는 하루 한 번씩 잊지 않고 꼭 티타임 시간을 가진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뉘어 진다고 한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차를 단숨에 다 들이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차를 절반만 마시고 얼굴과 손을 씻는 사람도 있었다. 전자가 미래도 없는 본능적인 동물적 행위에 가깝다면, 후자의 경우는 미래를 차분히 준비하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자기 성찰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존율의 기록을 조사해 보니 역시 후자쪽의 생존율이 훨씬 더 높았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헐, 할, 누구를 위해 기도 할 것인가? 세월호가 그러하듯이,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또다른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