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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바로 봅시다

편집부   
입력 : 2017-03-03  | 수정 : 2017-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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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의 ‘새’라는 시를 읽으면서 이 글을 열고자 한다.

새가 죽었다/ 참나무 장작으로/ 다비를 하고 나자/ 새의 몸에서도 사리가 나왔다/ 겨울 가야산에/ 누덕누덕 눈은 내리는데/ 사리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새떼처럼 밀려왔다//
이 시는 시인이 1993년 11월 모 잡지사의 의뢰를 받고 취재를 위하여 다비식장에 참가했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시이다. 장소는 가야산이고 시간은 겨울이다. ‘누덕누덕’ 눈이 내리는 가야산이 그 배경이다. 누덕누덕 기운 누더기 장삼 하나로 살아온 큰 스님의 다비식 풍경이다. 누더기 한 벌로 7년간의 장좌불와를 하고, 백련암에서 ‘천배를 하라’고 호통쳤던 성철 스님의 이야기다. ‘누덕누덕’ 내리는 눈(雪)에서 누더기를 입고 파계사에서 철조망을 치고 묵언정진 했던 스님의 모습이 보인다. 눈(雪)은 보는 사람의 눈(眼)에 따라 꽃으로 보이기도 누더기로 보이기도 한다.

세상은 있는 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대로 있다. 눈의 본질은 물이다. 물이 끓으면 수증기가 되고 수증기는 열에 의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계절에 따라 그 몸을 바꾸어 태어난다. 봄에는 아지랑이가 되고, 여름에는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되기도, 가을에는 하얀 새털같은 구름이 되기도, 겨울에는 하얀 눈으로 내리기도 한다.

눈은 물이 되기도, 증기가 되기도, 얼음이 되기도 한다. 형체를 보이면 유형물(有形物)이고 형체를 보이지 않으면 무형물(無形物)이다. 물의 본성은 무엇일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라는 성철스님의 법어처럼 물은 물일 뿐이다. 눈(雪)을 눈(眼)으로 보고 물이다, 눈이다, 얼음이다, 분별한다. 다 분별심이다.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에 분별심이 일어난다. 물의 본성은 변함이 없다. 일체는 유형무형물(有形無形物)의 변천동작(變遷動作)을 말함이다. 이러한 변천동작을 ‘윤회’로 설명한다. 우주 만물은 눈(眼)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지만 그 본질의 무게는 변함이 없다. 이를 우리는 ‘질량 불변의 원칙’이라고 하고, 큰 스님은 불교의 윤회사상을 질량불변의 원칙으로 설명했다.

시인은 스님의 열반을 ‘새가 죽었다’고 하였다. 새가 스님이 되기도, 사리를 친견하러 온 사람들이 되기도 한다. ‘사리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새떼처럼 밀려왔다’고 한다. 왔다가 가는 것이 어찌 사람 뿐이며 출생과 죽음 뿐이던가, 한 생각도 찰라에 왔다가 가는 것이다. 피고 지고, 나고 죽고, 가고 오는 것도 순간이다. 인연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사람이 죽으면 영식은 홀로 떠나고 육신만 남는다. 몸은 흙으로, 피와 땀과 눈물은 물로, 따뜻한 기운은 불로, 움직이는 기운은 바람으로 돌아간다. 육신은 사대(地, 水, 火, 風)로 돌아가고 영식은 인연따라 육도를 윤회하는 것이다.
내가 선업을 지으면 선업이 돌아오고 악업을 지으면 악업이 돌아온다. 많이 지으면 많이 돌아오고 적게 지으면 적게 돌아온다. 누가 누구에게 복을 주는가? 복은 내가 지어 내가 받고 죄도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이다. 이것이 ‘인과의 법칙’이다. 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 복밭에 복을 심으면 복이 나고 잘 가꾸면 수확도 많다. 내가 짓는 것은

작용’이고 내가 받는 것은 ‘반작용’이다. 그 힘의 크기는 똑 같다. 이를 뉴턴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 했고. 큰 스님은 인과의 법칙을 이렇게 설명했다.

불교의 믿음은 우주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윤회사상’과 인(因)지어서 과(果) 받는다는 ‘인과의 이치’를 믿는 것이다. 제법(諸法)은 무아(無我)하고 제행(諸行)은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만큼 받는다는 것을.

김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