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만다라

재후두(在後頭)

맹난자(수필가)   
입력 : 2003-03-18  | 수정 : 2003-03-18
+ -
세상 인심은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라 무상하게 변전(變轉)하고, 세계 정세는 자국의 이해타산을 쫓아 시비가 엇갈리고 있다. 이제 전운(戰雲)이 감도는 중동지역의 불안감으로 지구촌 인심은 분분하기 그지없는데 그래도 절기만은 정직하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늘의 운행은 건강하기 때문이라는 '주역'의 말씀 '천행건(天行健)'을 깊이 새겨본다. 입춘을 지낸 나무의 몸피는 어느새 빛깔이 다르다. 죽은 듯 하던 나뭇가지에는 작은 망울이 부풀고 창 밖 목련나무에는 연두가 묻어있다. 누가 그렇게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봄이 되면 으레 그렇게 될 것이라고 심상하게 보아 넘기던 때와는 달리 요즘 나는 나무의 색채와 변화하는 모습에서 많은 말씀을 전해 듣곤 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죽은 듯 텅 비어있는 나뭇가지가 공(空)인가 하면 그 속에서 연두의 어린 새잎과 붉은 꽃잎이 피어난다. 화려한 녹음이 당당한 한때를 자랑하지만 어느새 나목의 공(空)으로 환원하지 않던가. 있다고도 볼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실상묘유(實像妙有)의 실체를 나는 매일 가깝게 나무에서 본다. 탄생과 죽음마저도 나무에서 본다. 영원한 항상성(恒常性)과 있음의 덧없음도 나무에서 본다. 창 밖에서 전해 오는 스멀스멀한 태양의 기운, 이제 검붉은 밭이랑에서도 머지않아 생명이 눈을 뜨고 이윽고 대지에 연두가 피어나리라.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경작을 위해 봄 들판으로 나서야할 때다. 묵묵히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의 모습이 보인다. 한줄기 청산의 경치가 그윽한데, 앞서 갈던 밭을 뒷사람이 거두는구나. 뒷사람이 차지했다고 기뻐하지 말라. 다시 차지할 사람이 바로 네 뒤에 있느니라. '재후두(在後頭)'의 말씀이 바람결에 실려 온다. 우리는 이렇게 다만 지나가는 것을. 소유할 수도 없는 저 푸른 대지. 검붉은 흙을 밟는 순간만 우리는 현존(現存)한다. 나는 아직은 비어있는 나뭇가지에서 이 같은 말씀을 전해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