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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찾아서

민경성(시인)   
입력 : 2003-03-18  | 수정 : 200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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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짓기에 한창 몰두 할 때가 있었다.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에도(動靜一如) 시적 상황을 만들어 나아갔고 잠들기 전에도 머리맡에 메모지와 필기구를 놓고 잠들었으며 꿈속에서도 그 살아서 푸들거리는 언어를 낚아채느라 여념이 없었다(夢中一如).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한 방법이었고 행(行)주(住)좌(坐)와(臥)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결과물인 시작품들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아니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시의 구성원인 언어들을 너무 학대하였거나 지극히 인위적이었으며 잘못 언어의 숲으로만 들어가니 인간성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자주 목격되었다. 그 후로 한동안 나는 시를 멀리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현실 속의 내 초라한 모습이 싫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니 이 세상에 시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캄캄한 밤하늘에 미지의 꿈을 부화시키려는 알처럼 떠있는 별들, 한낮에 우리의 머리 위에서 밝은 빛을 뿌리며 떠 있는 태양, 덧없이 떠나가는 세월의 표상인양 우리의 살갗과 머리칼을 슬쩍 건드리며 떠나가는 바람, 신록의 숲에서 삶의 기쁨으로 손짓하는 푸른 나뭇잎들의 아우성, 어둡고 흐린 공간을 빗금 치며 떨어지는 빗줄기들, 스스로 광대한 시공의 소멸점이 되어 떨어지는 눈송이들, 또한 도시에 줄지어 서 있는 건축물들 사이 그 길 위로 두 손을 흔들고 두발로 걸어 다니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 또한 그 인간들이 만든 자동차와 비행기와 배들. 에헤라 정말 하늘아래 시 아닌 것은 하나도 없는데 굳이 시를 쓴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하는 법. 온갖 사물을 분별하고 지각하는 이 마음이 깃들어 사는 '나'라는 유한한 생명체가 어느 덧없는 한줄기 꿈속에서 버둥거리며 산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펜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시는 미망의 길을 가는 인생살이에서 깨달음의 기록이어야 하고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구체적인 표현의 그 무엇이어야 했다. 우리나라의 고승 청허당 서산대사는 마을을 지나다 닭 우는 소리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정말 시작(詩作)을 하는 과정이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깨친다'는 것은 무심(無心)을 증득(證得)하는 것이고 무심을 증득하면 거기에서 큰 지혜의 빛이 생기고 큰 자유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마치 악몽을 꾼 뒤 현실에서 그 악몽을 바라보듯이. 개개의 나무를 알 필요도 있지만 숲 전체를 조망해 볼 시간도 필요한 것이었다. 멀리서 떨어져 보니 한결 시가 사랑스러워 보였고 보다 여유로운 마음속에서 시의 탄생을 기뻐할 수 있었으며, 오늘 새벽 머리맡에 나는 이런 시가 쓰여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 길/ 아주 먼 길/ 바람을 따라가다/ 혼자 돌아오는 길/ 당신은 누구인가/ 작고 엄격한 사원(寺院)의/ 돌멩이 하나를 오래 오래 지켜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