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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 내리는 날

민경성(시인)   
입력 : 2003-03-18  | 수정 : 200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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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첫눈이 내린다. 탐스런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려 쌓인다. 범망경(梵網經)에 하나의 꽃송이가 1백 억의 나라라고 했는데 대선을 이십여 일 앞둔 시점이라 그런지 떨어지는 눈꽃송이 하나 하나가 무수한 대선 공약처럼 어수선하다. 한 때 영웅시되던 민주화운동이 정권을 잡기 위한 방편으로 변질된 채 새로운 민주국가건설을 위한 토대가 붕괴되어 버린 공사장의 그것처럼 을씨년스런 몰골을 드러내고 있는 지금, 다시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대다수의 민심은 눈 내린 빙판길을 가듯이 불안할 뿐이다. 선거 때만 되면 대선주자들의 대중을 속이는 이미지에 속고 현란한 슬로건에 속으며 패싸움하듯 흥분된 마음으로 대통령을 뽑아 놔 봐야 다 그렇고 그렇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찍긴 찍어야 할텐데 머릿살만 아플 뿐이니 삼천대천세계에 미진(微塵)으로 떠도는 저 눈꽃송이들이나 우리 유권자들이나 불쌍하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저 눈송이의 말마따나 모든게 헛것이라고 해공제일(解空第一)을 자처하며 현실을 도외시 할 수도 없는 일. 평소에는 아스팔트길을 미친 듯이 달리던 차량들도 지금은 한낮인데도 전조등과 깜빡이를 켠 채 거북이 걸음으로 엉기고 있다. 이때 내리는 눈송이들이 그들의 차창으로 존재와 사물에 대한 사구게(四句偈)를 들려준다. 모든 것은 하나이다. 모든 것은 하나가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이고 또 하나가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가 아니고 하나가 아닌 것도 아니다. 어떤 이의 차창에 쌓이는 희디흰 레토릭을 와이퍼가 신경질적으로 쓸어내고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이여 하나의 표심이여 하나의 눈꽃송이여, 한 등불이 능히 백천 등불이듯이 다시 희망을 가져 보기로 하자. 하나 하나의 보잘것없는 눈송이들일지라도 그들이 무게를 갖게 되면 낡은 곳이 있는 집은 무너지고 썩은 곳이 있는 나무는 부러지지 않던가. 지금 사천만의 TV속에서 좌향좌 했다 우향우하고 우향우했다 좌향좌하는 삐에로들. 나이가 많다느니 적다느니 진보니 수구니 하고 삿대질을 하고 말장난을 하며 싸우는 그들 중에서 하나를 꼭 고른다면 그간의 행적이 정직했고, 남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알았으며 위기에 처했을 때 용단을 내릴 줄 아는 인물이어야 하리라. 칼바람 치던 겨울들판에 소리 없이 흰 이불을 덮어 그 안에 푸른 보리 싹을 틔우며 봄을 준비하는 저 눈꽃송이들의 모습은 지도자나 우리 민초들이나 모두 본받아야 할 공덕이리라. 지금이라고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에 받아 보라. 거기 가볍게 사라져 가는 생명의 글썽거림이 무언의 말을 하고 있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