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34

허일범 교수   
입력 : 2002-08-05  | 수정 : 2002-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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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관정법구 1. 관정의 법구 밀교에서는 진언의 실체를 체득하고, 호마에 의해서 모든 더러움을 제거하고 나서 자비심을 일으킬 수 있으면 실로 훌륭한 진언행자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진언행자는 만다라의 세계를 증득한 자로써 자신이 곧 대일여래와 동격이라는 것을 체득한 자를 말한다. 따라서 이 경지에 도달한 진언행자는 대일여래의 지위를 인증받는 관정을 수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때 관정을 받은 진언행자는 그 증거로써 금비, 명경, 법륜, 법라등을 수여받는다. 이들 법구는 차례로 무지의 장막을 제거하고,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는 것, 전법륜의 활동, 진언도의 개시를 나타낸 것이다. 이들 법구를 수여받은 뒤 진언행자는 보리심을 견고히 하도록 하기 위해서 삼매야의 사중금계를 수여받는다. 그것은 법을 버리지 않고, 보리심을 버리지 않으며, 일체법을 간린하지 않는 것과 중생에게 이로움이 되지 않는 행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관정을 받은 진언행자는 그 대로 대일여래의 마음이며, 신체로써 자신이 곧 대일여래라는 확신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전통적 전법관정 의식은 인도로부터 동북아시아의 각 지역에 전파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티베트와 일본등지에서 그 법맥이 전승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통일신라시대에 몇몇 밀교승들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관정을 받은 일이 있고, 그 후 고려시대에 접어 들어 수차례에 걸처서 관정도량이 개설되어 국왕과 밀교승들이 관정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접어 들면서 불교의 세력이 약화되고, 밀교의 관정의식도 문헌적 기록에서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몇 종류의 관정용 법구들이 전해지고 있어 그것을 통해서 당시에 집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관정의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경전에서 설하는 네 종류의 관정용 법구중에서 법라와 명경이 현존하고 있으며, 금비와 법륜은 법구로써 단정지을 수 없지만 유물이나 도화로써 전해지고 있다. 현단계에서 이들 관정용 법구들이 어떤 형태로 의식에서 활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관정의 수여와 관련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들은 밀교관정의 법맥이 끊긴 오늘날의 현실속에서 이들 관정용 법구를 밀교적 측면에서 조사하고, 치밀하게 분석해 봄으로써 당시 이들 법구제작의 의미를 되살릴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2. 명경의 제작 우리나라에는 불가에서 사용하던 명경들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동경이라하여 청동으로 만든 거울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불가에서 사용되던 동경은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보통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쓰인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쓰일 경우, 그 이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나 불가에서 이것을 사용할 경우, 불교의식의 법구가 되는 것이다. 특히 진언의 종자자나 만자, 경전의 게송등이 새겨진 동경은 틀림 없는 의식용 법구이자 밀교의 관정의식에서 반드시 필요한 법구이다. 우리들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동경의 활용목적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 동경중에서 중앙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진언각인 동경은 더욱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관정의식이 집행되었다는 단편적인 사실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관정의식은 밀교의 전법의식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법의식에서 활용되는 조선시대의 관정용 명경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더욱 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전에서는 관정의 절차중에 이루어지는 명경의 수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진언행자는 맑은 거울을 가지고 모습이 없는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모든 진리는 형상없이 맑고도 맑아 오염되지 않으니 그것은 집착이나 말을 떠나 있다. 모든 현상은 단지 인과 업에 의해서 일어 날 뿐이다. 여기서 이 거울과 같이 진리의 자성이 오염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너는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일으켜서 세간의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이익을 베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명경은 진언행자가 지닌 마음의 청정함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유형과 무형의 경계를 초월한 지자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다. 아마도 조선시대 불교의식에서 명경의 활용은 전법의식의 절차속에서 관정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3. 명경의 장엄 금번에 발견된 조선시대의 관정용 명경은 충분히 밀교의 관정의식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명경의 활용목적은 물론이고 팔엽연엽과 금강저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진언을 팔엽연엽속에 새겨 넣고, 그 주위를 금강저로 감싸고 있는 모습은 마치 만다라를 명경에 옮겨 놓은 형태를 하고 있다. 그 형태를 보면 중앙의 연밥위의 진언자를 중심으로 해서 팔엽으로 된 연꽃문양의 한엽 한엽에 진언자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팔엽연엽의 둘레에는 점으로 된 장엄이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삼고금강저 문양이 둘레를 감싸고 있다. 여기서 명경의 장엄에 아홉자로 된 진언이 새겨진 것은 아마도 조선시대 전승되고 있던 준제구자천원지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명경에 새겨진 진언자의 위치와 지도의 위치는 다르지만 중앙의 진언을 중심으로 해서 바깥에 여덟자가 감싸고 있는 모습은 일치한다. 이와 같이 지도에 중심되는 문자를 중심으로 해서 여덟자가 감싸고 있는 모습은 명경에서 팔엽으로 된 연엽속에 진언을 새겨 넣은 모습으로 변형되어 있다. 이것은 팔엽이 지니고 있는 만다라의 의미가 채용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팔엽은 각각 관상만다라에서 사불과 사보살을 의미한다. 여기서 명경의 제작자는 이러한 의미를 반영하여 불보살의 집합체인 팔엽연화에 아홉자로 된 진언을 새겨 넣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팔엽만다라의 의미가 명경속에 채용되면서 오홉자는 불공삼장이 번역한 칠구지불모소설준제다라니경의 의미를 따라서 "옴"은 삼신이나 일체법본불생, "차"는 일체법불생불멸, "레"는 일체법상무소득, "추"는 일체법무생멸, "레"는 일체법무구, "춘"은 일체법무등각, "디"는 일체법무취사, "스바" 는 일체법평등무언설, "하"는 일체법무인이라는 의미로 전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명경에 새겨진 진언자는 어떤 특정한 존격의 진언이 아니라 불보살을 총칭하는 새로운 형태의 진언문자로 되었던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조선시대에 제작된 관정의식용 명경은 팔엽만다라의 기본구조와 진언을 조합한 독특한 형태의 밀교법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