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32

허일범 교수   
입력 : 2002-07-02  | 수정 : 2002-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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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의식과 밀교법구 1. 밀교법구의 제작 밀교의 법구는 행법과 의식의 집행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밀교의 행법에서 의식집행자가 지닌 법구는 불보살이 가진 지물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곧바로 신앙적 측면에서 의식집행자의 서원이며, 존이 가지는 서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밀교의 법구들이 온전하게 전승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삼국시대이래 고려시대를 거처서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어떤 종류의 법구들이 밀교의식에 활용되었으며, 그것들이 어느 정도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간파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근세에 까지 전해지고 있는 몇 안되는 법구들의 경우도 대부분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을 뿐 실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가운데 우리들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밀교적 성격의 의식집들의 내용을 통하여 당시에 이들 의식에서 행법의 집행자가 밀교의 법구들을 활용하여 의식을 집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들은 단편적인 의식집들의 내용과 현존하고 있는 법구들을 가지고 당시에 집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의식의 내용과 법구제작의 필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존하고 있는 밀교의 법구가운데 대부분의 밀교의식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금강저나 금강령을 제외하고 전승되고 있는 것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들이다. 그것은 삼국시대이래 전통적인 밀교의식이 제대로 전승되고 있지 않았으며, 전승의 맥이 끊어진 결과 법구의 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가운데 황폐화된 조선시대 억불의 시대적 배경속에서 밀교의 법구가 제작되어 국난극복을 위한 의식이나 왕실의 서원불공에 부분적으로 활용되었던 흔적들이 발견된다. 현존하고 있는 조선밀교의 법구중에서 의식용으로 활용된 것은 오대산의 월정사나 두륜산 대흥사의 것들이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 있다. 여기서 우리들은 대흥사의 의식용 법구들을 통하여 당시에 집행되었던 의식의 내용과 목적에 대해서 살펴 보기로 한다. 2. 진병의식과 법구 우리나라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대흥사의 법구들은 분명히 밀교적 의식의 집행에 활용된 것들이다. 이들 법구들은 마치 전장에서 쓰이는 무기와 닮았으면서도 자세히 보면 의식용 법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들 법구들은 밀교의 경전에 나타나 있는 것들로 원적퇴치를 위한 의궤들에서 등장한다. 이 법구들이 제작된 것은 서산대사가 활약했던 16세기 말로 왜적의 퇴치를 위한 의식에 활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이들 법구들이 어떤 의식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왜적의 퇴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현존하고 있는 법구의 성격과 그 활용에 대해서 살펴 보기로 한다. 첫 번째로 대흥사의 법라는 소라의 껍데기로 만든 순백색의 법구로 손에 쥐기 쉽도록 새끼줄로 몸체를 감싸고 있는 형태이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법체를 의미하며, 그것을 불 때 나오는 소리는 여래의 음성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밀교의 의식에서는 의식의 성격에 따라서 여래의 목소리로 제천신을 불러 들이거나 죄업중생을 서방극락정토로 인도하는 정의만다라공양에 흔히 쓰인다. 한편 관정시에는 아사리가 제자에게 법통승계를 증명한다는 의미로 법라를 수여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제천의 소청과 죄업의 소멸, 그리고 관정에 쓰이는 법라는 당나라 때, 불보살을 예경하거나 법회의 보조법구로써 활용된 일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다할 활용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다만 대흥사 법라의 경우는 전시의 진병의식에서 천신의 가호와 살생의 죄업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의지를 병사들에게 심어 주기 위해서 활용된 것으로 여겨지며, 적진의 공격시에 신호용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두 번째로 삼고극은 장봉의 끝 부분에 세 개의 뿔을 나타낸 삼지창 형식이다. 이것은 실재로 전투에 쓰일 수 있는 무기로 밀교의 의식에서는 교령륜신인 명왕들의 지물로써 활용된다. 여기서 명왕들의 지물일 경우는 삼독의 번뇌를 항복시키고, 불부와 연화부와 금강부 제존의 가피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현존하는 삼고극은 불보살의 가피로 전투의 승리와 원적퇴치를 위한 기원용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세 번째로 보장은 장봉의 끝에 타오르는 화염에 감싸여 있는 보주를 나타낸 형태로 사천왕중에서 비사문천의 삼매야형으로 쓰인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중생들에게 엄습하는 궁핍의 고통과 간탐의 업보를 제거하고 여의보의 즐거움을 베푼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진병의식에서는 사천왕의 가호를 입기 위한 의식의 진행에서 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네 번째로 산개는 일반적으로 일체의 중생을 외부에서 오는 장애로부터 감싸서 보호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밀교의식에서는 관정을 내릴 때 제자에게 관정의 인명을 내린 뒤, 아사리가 산개를 들고 제자의 머리에 올려 놓는 법통전승 의식에 쓰인다. 즉 산개는 불제자를 모든 장애로부터 보호하고, 불법을 온전하게 보전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법구류로써 산개가 쓰인 예는 매우 드문일인데, 산개의 용도로 보아서 당시 법통을 계승할 때 쓰였거나 승병으로 출전한 승군들에게 불보살의 가호를 빌기 위해서 결연관정을 내리는데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섯 번째로 마갈당은 인도의 신화에서 대양의 신 바루나의 탈것으로 등장하며, 머리는 영양과 같고, 꼬리는 물고기 형태이다. 이것은 밀교경전에 수용되어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없애고, 대보리심을 굳건히 지키며, 보리의 공덕을 취한다는 것을 나타내게 되었다. 현존하고 있는 대흥사의 마갈당은 그 용도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경전에 나타난 마갈어의 성격을 수법에 활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실재로 마갈당을 든 시자의 모습은 선운사 명부전의 시자상에서 나타나고 있다. 금강역사와 함께 활동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 시자는 오른 손에 마갈당을 들고, 제마를 퇴치하는 금강역사를 돕고 있는 모습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현존하는 조선시대 법구가운데에서 대흥사의 진병의식용 법구들은 임란당시의 긴박했던 시대상황을 반영하여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불력에 의한 원적퇴치의 의식에 활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