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22

허일범 교수   
입력 : 2002-02-18  | 수정 : 200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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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의 건국과 밀교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의 탄생은 불교에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고려시대 무신의 난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회체제의 동요, 장기간에 걸친 몽골과의 항쟁, 계속되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관료기강의 문란, 사원경제의 비대화로 인한 병폐 등은 고려왕조의 기반을 근저로부터 동요시켰다. 그런 사회적 변화와 혼란 속에서 사대부라고 하는 새로운 관료계층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들은 개혁을 주도하는 혁신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오랫동안 고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였던 불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불교를 대신한 유학의 이념을 가지고 새로운 정치와 사회적 질서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고려 말의 상황들은 고려의 기성질서를 혁파하려는 이성계의 의도와 상통하였다. 여기서 신왕조를 창건한 이성계는 건국초기에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의결기관을 통하여 정치를 운영하였고, 그들의 의사는 정치면에 현저하게 반영되었다. 또한 그들이 중심이 되면서 정치이념의 기조를 이루게 된 것은 유학사상이었다. 유학사상이 흥행함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불교가 쇠퇴해져 가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고려말기인 공양왕 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척불운동으로 불교는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아왔다. 그들은 불교를 민폐의 최대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원의 경제적 비대화와 승려의 비생산성을 불교배척의 가장 큰 이유로 들었다. 이러한 사회상황은 조선초기에 들어서서 불교를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억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태조 이성계는 불교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었다. 그것은 무학이나 신조 같은 승려와의 관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태조는 권좌에 오른 후 곧 무학을 왕사로 봉하였고, 조구를 국사로 삼았다. 그리고 고려시대부터 불사를 진행해 오던 연복사의 탑을 중창하기도 했다. 여기서 연복사 탑의 중창불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연복사는 개성의 한천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037년에 정종이 행차한 사실이 있어 그 이전에 이미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사찰의 명칭은 광통보제사, 대사, 당사 등으로 불리었으나 고려사에 의하면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할 때쯤 연복사라는 명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본당에는 석가, 문수, 보현의 삼존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리고 1314년 충숙왕이, 1368년과 1370년에 공민왕이 이 사찰에 행차한 적이 있으며, 공양왕 때인 1391년에는 목조 5층탑의 건립이 시작되어 1393년 조선 태조 2년에 완성되었고, 그 안에는 불사리와 대장경, 그리고 비로자나불상과 탱화를 봉안하였다. 한편 1327년 충숙왕 14년에는 지공이 계를 설하고, 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를 강설한 후 그것을 전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러모로 이 사찰은 밀교와 관련을 가지고 있는 사찰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고려의 국왕들에 의해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법회장으로 쓰였던 이 사찰을 조선의 창업기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고려의 공양왕 때부터 국난의 극복을 위하여 건립하기 시작하였던 건립의도를 계승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탑의 건립과 더불어 불사리신앙을 고취하고 대장경의 봉안을 통하여 부처님의 가피를 입으려 했으며, 무엇보다도 연복사의 동종에 새겨진 오불진언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오불신앙의 중존인 비로자나불을 탑 안에 봉안함으로써 밀교적 현세이익을 성취하려고 했던 것 같다. 아울러 태조는 건국 경찬사업으로 대장경의 인경과 금은자사경을 하게 하고, 소재도량을 개설토록 하였다. 여기서 소재도량은 고려시대 때 여러 차례에 걸쳐서 개설되었던 밀교의 식재도량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 창업당시 태조의 불교에 대한 태도는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시 불교를 대체할 수 있는 특출한 종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건국초기의 민심 수습을 위해서라도 급격한 유교이념의 도입에는 무리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불교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는 후대의 왕들에 의해서 대부분 무시되었다. 다만 왕실 내에서 필요에 따라서 불교로부터 도움을 청하고, 간헐적으로 사찰의 불사에 참여하는 일들이 이루어졌다. 2. 조선밀교의 전개 고려시대의 밀교가 그러했듯이 조선시대의 밀교도 종파와 인물을 통한 법맥상승의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조선 초에 밀교의 종파로 보여지는 총지종과 신인종이 존속하고 있었고, 세종 때 선종과 교종으로 종단이 통폐합될 때까지 그 명맥을 계승하고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들 종파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밀교를 표방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불교통사에 "진언종의 진경과 신주를 또한 금하였으며, 겨우 청우와 시식의식이 존재했다"라는 기록과 태종실록에 "총지종은 오직 밀교를 하는 사람들의 묘술이며, 둔갑으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개설되었다. 그러나 이 종파의 승려들은 그 맡은 바를 알지 못하였다. 지금부터 궁과 사원의 주지에게 알려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명을 내린 일이 있다. 이것은 당시 밀교 종파에 대해서 신주를 독송하고, 청우법 등을 행하며, 둔갑술로 세인을 구하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실록은 불교를 신행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진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인식에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조선시대에 간행된 각종 의식집이나 사찰의 장엄 등을 보면 또 다른 각도에서 밀교를 이해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식집 중에서 경전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으며, 진언집과 같이 역대 유통되었던 진언들을 모아서 집성한 것도 있다. 이들 의식집이나 진언집 등은 심오한 밀교의 교리를 설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의식을 집행할 수 있는 절차나 거기서 이루어져야할 독송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단순한 형태로 이루어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것들을 통해서 단편적으로나마 밀교의 맥을 전승하고 있었으며, 그런 방법만이 밀교가 살아 남을 수 있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아울러 사찰의 장엄에 다양한 종류의 진언이나 종자자를 새겨 넣어 단청에 활용한 것은 그 어느 지역의 불교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양상이다. 중국이나 몽골지역에서 진언과 단청의 조화를 통한 사찰장엄을 발견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만큼 교리적 측면까지 고려한 진언종자의 장엄을 발견할 수 없다. 이것 또한 억불정책으로 일관되었던 조선시대 밀교의 또 다른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은 앞으로 조선시대 밀교를 다룰 때, 밀교의 경전이나 법맥상승에 의한 접근보다는 의식집의 내용을 분석하여 그것의 밀교적 성격을 규명하고, 진언종자를 통한 사찰장엄의 의도를 파악해감으로써 조선밀교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