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18

허일범 교수   
입력 : 2001-11-17  | 수정 : 200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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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밀교의 대석동체신앙 1) 동체신앙의 형성배경 우리 나라에서 대일여래와 석가모니를 예경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삼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에는 이들 두 부처님이 각기 다른 속성을 가진 존격으로서 받들어 졌으며, 각 사찰이 지향하는 수행과 신앙목적에 따라서 본당에 안치되었다. 대일여래는 비로자나라는 이름으로 화엄계통의 사찰에서 모셔졌으며, 석가모니는 일반사찰에서 통불교적으로 받들어졌다. 따라서 대일여래라는 명칭보다 화엄의 주존인 비로자나라는 명칭이 일반화되었으며, 존형은 화엄경에서 설하는 법신의 인격화된 형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봉안되어 있는 비로자나의 모습은 밀교경전이 성립된 이후에 등장하는 대일여래의 모습이다. 즉 여러 사찰에 안치되어 있는 비로자나는 밀교와 일반불교의 존형융합을 통하여 나타난 모습이다. 특히 당나라 때부터 등장하는 선무외계 존형과 유기경의 지권인이 결합한 독특한 형상이다. 이와 같은 형상은 밀교는 물론이고, 일반불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존형이다. 그리고 석가모니의 형상 중에서 가장 일반화되어 있는 여원인과 항마촉지인의 형상은 그 모습에 별다른 변화가 가해지지 않은 상태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그 후 이 두 존격은 고려시대에 들어서서 합체불의 형상으로 전개되어 대일여래와 석가모니가 동체를 이룬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모습은 아시아의 어느 지역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로 대석동체신앙을 낳게 되었다. 그것은 신앙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현 단계에서 고려시대 때 교리적으로 대일여래와 석가모니에 대한 관계설정이 확립되었다는 문헌적 전거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전라남도 화순의 운주사에 안치되어 있는 대일여래와 석가모니의 동체상은 두 존격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나 석탑의 유형, 주변에 펼쳐져 있는 존상들의 배치 등을 통하여 신앙의 목적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당시에 교리적으로 대석동체나 별체에 대한 교판이 확립되어 있었다면 그와 같이 대담하게 동체불과 대석양존 일색의 불상을 사찰의 전역에 조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동체불 조성자는 순수하게 신앙적 측면에서 이와 같은 대석동체세계의 이상경을 표현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서 고려불교와 밀교의 습합 내지 대석동체신앙의 진수를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대석동체불의 조성을 통하여 당시의 시대적 불확실성을 타개해 나아가려고 했던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2) 고려인의 대석동체관 원래 대일여래와 석가모니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승불교가 흥기한 이래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교설의 설주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즉 불멸 후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에 편찬된 경전의 설주를 석가모니로 하느냐 아니면 다른 불격을 등장시키느냐의 문제로 발전한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불격들이 등장하였고, 그 중에는 대일여래라는 불격도 나타났다. 인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대부분의 경우, 동체설을 취하는 입장이었으며, 석가모니는 대일여래의 응화신으로서 둘이면서 둘이 아닌 관계에 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동아시아의 밀교에서는 대일여래와 석가모니의 관계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동체로 보는 견해와 별체로 보는 견해로 양분되었다. 그것은 다 같이 선무외삼장의 저작인 대일경소의 입장을 따르는 유파와 대일경의석을 따르는 유파사이에 일어난 논소해석의 차이에 의한 것이다. 대일경소계통의 유파에서는 대일여래와 석가모니를 분명히 별체라고 규정하고, 대일경의석계통의 유파에서는 동체로 보고 있다. 여기서 별체와 동체관은 일반불교와 밀교의 관계를 설정하는데에도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별체로 설정할 경우 밀교는 불교와 결별한 새로운 모습이라고 규정할 수 있으며, 동체라고 할 경우, 대승불교와 밀교는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종파성립의 교판과 수행체계에도 판이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일본의 경우는 밀교의 종파가 성립된 이후, 진언종에서는 별체설을 세우고, 천태종에서는 동체설을 주장한 상태로 양분되어 오늘날까지 그 논쟁이 끝나지 않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동체와 별체에 대한 뚜렷한 견해가 제시되지 않은 상태로 통불교적인 성향 속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확실한 구분을 짓지 않고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대석합체불을 조성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대석에 대한 관계설정 이전에 신앙적 측면에서 대석이 두루 갖춘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반불교와 밀교의 교주는 별개의 대상으로 구분되지 않고, 통불교적인 입장에서 이해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3) 대석동체 세계의 구현 전라남도 화순에 위치하고 있는 운주사는 창건연대가 불확실하지만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말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 곳에서 명나라 효종의 연호가 새겨진 기와파편이 발견되어 조선시대 초에 중수불사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창건자에 대해서도 도선, 운주, 마고 등 이설이 분분하지만 이 사찰에 풍수지리적인 설화들이 다수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도선창건설이 유력하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본당과 석탑들이 크게 훼손된 일이 있었으며, 근세에 들어서서 중건한 일이 있다. 1942년의 조사에 의하면 석불 213존과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석불 70존과 석탑 12기만이 남아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방형의 탑과 원반형의 탑 사이에 석조건축물이 나타난다. 그것은 우리 나라에서 유일한 대석합체불을 모신 곳이다. 그 석조물 안에는 지권인의 비로자나불과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불이 등을 맞댄 합체불의 형태로 모셔져있다. 이와 같이 불과 불이 합체를 이룬 형태의 불상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다. 합체불의 존형이 주류를 이루는 티베트불교의 경우도 불과 보살의 합체상은 있어도 대석이 동체를 이룬 형상은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은 고려 합체불의 경우, 경전적 전거에 의해서 조성된 티베트불교의 합체불과는 달리 신앙적 측면에서 합체불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합체불 각각의 정면에는 비로자나불의 앞에 원반형의 탑, 석가모니불의 앞에는 방형의 탑이 서 있다. 이와 같은 사원구조는 대석의 합체를 통한 불교의 융화와 법신과 화신의 합체를 통한 생산, 새시대의 도래를 기원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남쪽을 향해서 항마촉지인의 부처님이 모셔져있는 것은 남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왜구의 퇴치, 남쪽지방의 평정을 위한 방편을 쓰기 위한 것이며, 북쪽을 향하여 지권인의 부처님이 모셔져있는 것은 지혜의 광명으로 국가의 미래를 밝히고, 안위를 기원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탑의 형식은 밀교의 사종수법에서 원형은 식재, 사각형은 증익을 의미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사찰에는 보살상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오직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만이 원과 사각으로 이분화된 탑들 사이사이에 모셔져 있다. 그것은 산중턱에 있는 와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래도 이것은 건립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즉 당시의 불안한 사회적 현실 속에서 온 백성들이 화합을 이루고, 전 국토를 불국의 이상경으로 만들려고 했던 창건자의 서원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