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 58-병들다(1)

밀교신문   
입력 : 2020-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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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듦, 몸이 아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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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살아 있는 생명체가 피할 수 없는 네 가지 이치입니다. 이 네 가지 이치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새삼 거론할 그 무엇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 네 가지가 존재를 너무나도 힘들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요, 늙음도 괴로움이요, 병듦도 괴로움이요, 죽음도 괴로움이라고 하여 생노병사라는 네 개의 단어 뒤에는 괴로울 고()라는 글자가 꼭 따라붙습니다.

 

그런데 병듦은 괴로움보다 더 사무친 느낌을 안겨주었으니 그게 바로 아픔이었습니다. 얼마 전, 사랑하는 사람을 병고로 급작스레 떠나보내면서 나를 사로잡은 말은 아프다!”라는 그의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말을 나지막하게 몇 번 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머리로는 그 이치를 이해했지만 병듦이라는 엄연한 현실 앞에 몸으로 그 이치를 체득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말도 제게 했습니다.

 

○○이라는, 병원에서 전문가가 내려준 병명의 무게는 그리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꼼짝 못하고 그 아픔을 고스란히 겪어내야 하는 당사자의 모습이 지금도 마음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많이 아프지?”,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하지?”였을 뿐, 그 아픔을 당사자 아닌 사람은 어쩌지 못하여서 지금껏 괴롭습니다.

 

환자가 아픔을 호소할 때면 간호사실로 달려가 어서 진통제를 놓아주기를 요청했지만 진통제의 효과는 한계가 있어서 더 큰 아픔을 불러왔습니다. 설령 지독한 아픔 끝에 병이 낫더라도 그 몸은 크게 부서진 뒤끝이라 더 모진 병고가 예고되어 있지요. 몸이 병들어 아픈 까닭에 환자라 불리지만 이런 온갖 정황을 따져보자면 몸을 따라 마음까지도 아픈 사람이 환자요, 병자입니다.

 

요즘은 간병인을 고용하는 가정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사랑하는 사람의 몸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살피지 못하게 됩니다. 간병인의 숙련된 보살핌이 오히려 환자에게는 더 유리할 수 있겠지만 병원에서 지켜본 결과 간병인들의 보살핌은 기계적이요, 병상의 환자들은 몸의 아픔과 마음의 서러움을 사랑하는 가족에게 토해내지 못해 이중의 고통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가족이 그 고통을 덜어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환자들은 그래도 자신의 고통을 함께 나눌 가족을 그리워하니 이 아이러니 또한 병고가 불러오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그저 아직은 아프지 않은 사람의 교만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프지 않고 살다가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태어난 존재는 아픔을 겪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몸뚱이를 지니고 있는 이상 병을 피할 수 없고, 병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은 아픔을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네 가지 모습은, 달리 표현하자면 태어나고 늙고 아프고 죽는다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몸이 아프다라고요.

 

문제는 바로 이 몸의 아픔을 내 자신도 겪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병들어 아플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병듦과 아픔은 여전히 남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병고(病苦)를 지켜보며 함께 힘들어 하지만, 지금 병상에서 지독한 아픔을 겪고 있는 저 사람의 모습이 바로 내일의 나의 모습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섬뜩해지기까지 합니다.

 

경전에서도 숱하게 강조합니다. 생노병사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의 일이며 지금 당신 자신이 덧없음이라는 현상을 겪고 있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런 일들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찾아온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결국 싯다르타 태자의 사문유관이라는 에피소드까지 곁들이면서 경전에서는 당신 자신의 생노병사와 무상함을 절박하게 깨닫기를 강조합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남쪽문으로 나가서 병자를 만날 때의 상황을 불본행집경에서 살펴보기로 하지요.

 

태자는 보석으로 화려하게 꾸민 수레를 타고 왕족의 위엄을 드날리며 성 남쪽 문으로 나아가 동산을 향했다. 동산에서 즐겁게 노닐고자 함이었다. 그때 하늘의 신이 태자 앞길에 병자로 변해서 나타났다. 그 병자는, 뼈마디까지 괴로워하며 배에 난 종기에서 물이 흘러 매우 고통스러워하였다. 몸이 파리하고 팔과 다리가 비쩍 말라 가늘어졌고 혈색은 누렇게 떴으며, 숨을 약하게 헐떡이는데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고, 쓰레기 더미 가운데 뒹굴면서 신음하는 중이었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아아, 아버지! 아아, 어머니!’라고 나지막이 신음하다가 입을 열어 간신히 이렇게 말하였다.

 

나를 좀 붙잡아 주시오.’

 

태자가 그 병자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붙잡아 일으켜 달라고 간신히 말하는 것을 지켜보고서 마부에게 물었다.

 

대체 이 사람은 어떤 자인가?’

 

마부가 대답했다.

 

, 태자님. 이런 사람을 병자라고 합니다.’

 

태자가 다시 물었다.

 

병자라고 했느냐? 병자란 어떤 사람인가?’

 

마부가 대답했다.

 

태자님. 이 사람은 몸이 편안하지 못하고 그 위엄과 덕도 이미 다했고 매우 곤궁하고 힘이 없습니다. 죽을 때가 되어도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으며, 부모도 모두 죽고 없어 호소할 곳도 없습니다. 돌아가 의지할 곳도 없고 아픔을 호소할 곳도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은 오래지 않아 목숨이 끊어질 것입니다. 살고 싶어도 너무나 괴로워서 편히 잘 살 수 없고, 병이 낫기를 바라도 그럴 수가 없으며, 오직 때를 기다릴 뿐입니다. 태자님, 이런 인연으로 병자라고 합니다.’”

 

어떠신가요?

 

사랑하는 가족을 간병하면서 침상에 누워 아파하는 사람을 지켜보자니 그의 아픔이 안타까워 눈물이 났고, 그러다 문득 저 아픔을 나도 비껴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지레 무섭고 괴로워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싯다르타 태자의 사문유관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저 침상의 환자 모습이 바로 당신 자신일 수 있다는 사실! 오늘은 간병인의 침상에서 환자를 걱정하지만 내일은 당신이 바로 저 병상에서 모르핀의 효과가 빨리 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 이런 일들을 피해갈 사람은 없다는 사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런 엄연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알아차리기는커녕 병이라는 도적이 소리 소문도 없이 찾아오는데도 기쁨을 느끼고 즐거워하고 있으니이런 일들을 제 스스로의 몸과 마음으로 깨닫고 인지한 태자는 너무나도 두렵고 무서워져 몸과 마음이 덜덜 떨리는 것이 일렁이는 물결 속의 달과도 같았고, 벌벌 떨면서 이제나 저제나 제 몸 위로 떨어지는 매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라고 불소행찬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불본행집경의 또 다른 대목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로 병이 찾아오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대왕이여, 병이 찾아오는 것이 두렵습니다. 보통 건강할 때에는 몰랐다가 하루아침에 몹시 아파지고 이윽고 신음하며 지냅니다. 꽃빛이 곱디곱다가 문득 초췌하게 시들 듯 번뇌라는 원수가 매서운 독이 되어 앉고 눕는 일이 편치 않으니 이때를 당하면 누가 자기를 대신해주겠습니까? 병석에 누우니 행동이 마음을 따르지 못하니 이런 이유로 병이 가장 두렵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나이가 젊고 힘이 세어 마치 찬란하게 꽃이 핀 마을과도 같지만 복이 다하고 죄가 이르면 항상 하지 않아 덧없고 온갖 모습이 변하게 되니”(불설팔사경) 싯다르타 태자는 살아 있는 존재가 피하지도 벗어나지도 못할 병고를 직시하여 그 속에서 두려움을 보아 수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가 되셨으니, 부처란 존재는 본래 스승 없이 홀로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시건만, 경전에서는 굳이 부처에게도 스승이 있으니 그 중 하나가 병듦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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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마옥경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