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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벌레는 겨울을 모른다.

밀교신문   
입력 : 202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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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여전히 무덥지만 절기로는 입추(立秋)이니 이제 가을이 시작됩니다. 요즘 들어 유난히 하늘이 푸르고 높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하늘이 맑으니 고추잠자리 떼가 낮게 날아다닙니다. 나뭇등걸이 지나가는 잠자리에게 쉴 자리를 내줍니다. 잠자리는 그곳에 내려앉아 잠시 지친 몸을 쉬어 갑니다. 나무의 몸 안에는 겪어낸 겨울 만큼의 나이테가 숨어 있습니다. 나무가 잠자리에게 겨울의 혹한을 아느냐고 묻는 것은 허망합니다. 겨울을 겪어본 적이 없는 잠자리가 답할 여지가 없습니다.
 
먼 옛날,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황하(黃河)의 신(神) 하백(河伯)은 황하의 물이 끝없이 넘실대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매우 흡족했습니다. 자기가 다스리고 있는 황하가 가장 아름답고 넓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하백은 동쪽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걷고 또 걷다 보니 동쪽 땅끝에 닿게 됩니다. 순간 하백은 아연실색하고 맙니다. 그동안 자신이 다스리는 황하가 가장 크고 넓다고 여겼던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땅끝에는 황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넓고 큰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하백은 동해를 다스리는 신(神)인 약(若)에게 자신의 생각이 그동안 얼마나 편협했었는지를 반성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좁은 소견이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당신을 못 만났다면 나는 영원히 남의 웃음거리가 될 뻔했습니다.”
 
그러자 동해의 신(神)인 약(若)은 하백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세상에는 나의 혁신을 방해하는 세 가지 그물이 있으니, 첫째가 공간의 그물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는 바다에 대하여 설명할 수가 없소이다. 개구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우물이라는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요. 둘째는 시간의 그물입니다. 한여름만 살다 가는 여름 곤충에게는 겨울의 차디찬 얼음에 대하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사는 여름이라는 시간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지식의 그물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시골 선비에게는 진정한 도의 세계를 설명해줄 수 없습니다. 지식의 그물에 걸려 있는 사람은 다른 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고전 ‘장자(莊子)’에 나오는 생존에 걸림돌이 되는 세 가지 그물의 우화입니다. 정저지와(井底之蛙-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성어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개구리는 우물 밖의 세상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고작 자신이 올려다보는 작은 하늘과 우물 안을 세상의 전부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름벌레들은 겨울이라는 시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딱 여름 한 철만 살다 가기 때문입니다. 첩첩 산골에서만 살아온 선비는 자신만 최고라고 여기고, 남의 지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넓고 위대한 지식이 넘쳐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우물 안 개구리들이 염려스럽습니다. 소셜미디어라는 온라인 공간 곳곳에 우물을 파 놓고 무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물 안에서 자기가 아는 것만 최고라고 외치며 남의 생각을 조롱하거나 거친 글로 상대를 비난합니다. 진보라는 우물과 보수라는 우물, 여자라는 우물과 남자라는 우물, 노인이라는 우물과 젊은이라는 우물 속에 들어앉아서 개굴거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만이 곧 진리요 정의이며, 남의 생각과 행동은 악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이 세계에서는 자기 무리가 아니면 곧 적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공격합니다. 남의 생각과 주장을 듣거나 이해하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무리를 철천지원수인 양, 손가락질로 무자비하게 공격해댑니다. 더러 남의 주장을 들어보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재공격을 위한 분석과 방어수단일 뿐, 진실로 마음을 열고 상대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자꾸만 분열되어 혼란스러워지는 큰 원인입니다.
 
그런데, 과연 인터넷 공간 곳곳에 우물을 파고 사람들을 유혹하여 끌어들이고 있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익만을 좇는 자들입니다. 입을 열었다 하면 정의와 진실을 강조하지만, 애당초 그들에게 그러한 가치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거짓과 선동으로 자신들의 이익만 도모할 뿐입니다. 사람들을 음험한 우물로 끌어들여서 그들을 거짓과 선동의 도구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물은 사람을 황폐하게 합니다. 익명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악구와 양설, 망어와 기어를 양산하게 하여 구업을 짓게 합니다. 이런 우물은 사람을 개구리로 만들어 오로지 한 곳만 바라보게 하고, 거짓과 사기로써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우리가 음험한 목적을 가진 소셜미디어라는 우물에서 하루빨리 빠져나와야 할 이유입니다. 부디 스스로 우물 안에 뛰어들어 개구리가 되는 우를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곳만 바라보고 하나만 주장하는 우물 안 개구리들이 넓고 다양한 견해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봄과 여름만 아는 곤충들이 겨울을 알 리 없으니, 남의 사정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없습니다. 그런 무리가 횡횡하면 사회가 병듭니다. 다양한 시각과 관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 인정하는 사람이 많아야 우리 사회가 건강해집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 ‘열반경’에서 군맹무상(群盲撫象)의 예를 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맹인은 전도(顚倒) 집착(執着)의 상징입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전도망상 집착이라 하셨으나, 회당대종사님은 외도(外道)라 하셨습니다. 외도는 정도(正道)의 대칭어로서,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쳐 빠지는 언행을 뜻합니다. 그래서 회당대종사님께서는 누누이 이원(二元[평등])을 설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한눈을 파는 것이 곧 집착이다. 돈에 집착하고 사람에 집착하고 옷에 집착하고 춤에 집착하는 등 나쁜 일에 대한 집착이 곧 정도를 걷는 데 있어 한눈파는 것이 된다.”<실행론>
 
덕일 정사/무애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