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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북문(北門)이었을까?

밀교신문   
입력 : 20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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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4(진기 74) 부처님오신날은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르게 지나갔습니다. 부처님오신날뿐만 아니라 작금의 우리의 일상이 다 그렇기도 합니다.

 

코로나 19’라는 비상사태가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고 있습니다. 올해 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은 430일 국가 공휴일로 하루 보냈고, 불교계 전체의 한 달 연기 결정으로 또다시 윤 4월 초파일인 530일 부처님오신날을 보냈습니다. 한편으로는 한 달 내내가 부처님오신날 같았습니다. 그런데 생일잔치를 두 번 치른 느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법하게 잘 치렀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부처님 경전의 말씀처럼 세계는 일화(一花)이고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의 세상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무연대자(無緣大慈)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보살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현재의 공업(共業)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진호국가의 기도하는 마음을 모아야겠습니다.

 

코로나 시국인 이때 사바세계에 부처님 오심의 참뜻이 더욱 강조되어 가슴에 스미어듭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탄생 설화를 들여다보면, 아기 붓다는 태어나자마자 동남서북 사방을 차례로 둘러본 뒤, 북쪽을 향해 일곱 걸음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한 손은 하늘,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개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를 외쳤습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온 세상이 모두 고통 속에서 헤매니 내가 마땅히 이 세상을 편안케 하리라.”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대목에서 꼭 꼬집습니다. “붓다는 참 거만하다. 어떻게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 존귀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탄생 설화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은 거만한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을 비운 자만이 던질 수 있는 자기 선언적 고백이었습니다. 붓다는 무아(無我)’를 설했습니다. 유아독존의 []’와 붓다가 설한 없는 나[無我]’는 둘이 아닙니다. 붓다의 []’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와의 연기적 나[]이며 그렇기에 붓다는 나 없는 나, 오직 그만이 존귀하다고 외친 것입니다.

 

왕자인 붓다에겐 출가의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카필라성 왕궁의 동문 밖 나들이에서 늙음을, 남문 밖에서 병듦을, 서문 밖에서 죽음의 풍경과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생로병사에 절망했지요. 그런데 북문 밖 나들이는 달랐습니다. 나무 아래 수행자로부터 출가수행은 무상한 인간의 삶의 벗어나 생로병사가 없는 경지를 구한다.”는 말을 듣고 그는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붓다가 태어나자마자 사방을 둘러보고 일곱 걸음을 걸었던 방향은 북쪽이었습니다. 사문유관(四門遊觀), 여기서도 북문이었습니다. 생로병사의 인간 세상의 고통을 뛰어넘는 길, 수행의 길, 구도의 길, 진정한 나를 찾는 길, 그게 북쪽이었고 북문이었습니다.

 

한편 사문유관에서 붓다가 바깥세상을 경험하는 방향의 순서는 동서남북이 아니고 동남서북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서양식 교육의 영향으로 방향을 읽을 때 동서남북으로 십자 모양으로 잘라서 읽고 표기합니다. 그런데 동양의 방식은 그리고 불교적 사상으로는 동남서북으로 순환적으로 읽어가고 표기합니다. 해가 동에서 떠서 남을 거쳐 서쪽으로 지고 북쪽을 거쳐서 다시 동으로 솟아오릅니다. 불교 만다라 도상에서도 방향은 동남서북순서로 나타납니다. 자연의 순환적 이치와 부합되는 원리입니다. 이렇듯 불교는 종교를 초월한 우주적인 종교입니다.

 

하늘 별자리의 중심이 북극성입니다. 북극은 온 우주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북극성은 늘 제자리에 있습니다. 본인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자리,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예로부터 하느님이 사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중생의, 만물의, 인류의 중심축이었습니다. 영적인 중심입니다. 북극성은 길을 잃고 헤매는 나그네에게 길잡이가 되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바라는 위치에 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오히려 자신의 빛을 낮추고 다른 별들이 돋보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아기 붓다가 택한 일곱 걸음의 북쪽 방향은, 청년 붓다가 출가의 결심으로 택한 북문의 상징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삼개개고아당안지[온 세상이 모두 고통 속에서 헤매니 내가 마땅히 이 세상을 편안케 하리라.]’입니다. ‘자기 선언적 결심이었고 가지원력(加持願力)’이었고 무진서원(無盡誓願)’이었습니다. 그런데 붓다만 길을 택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늘 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 우리는 어떤 문을 열 건가요? 내가 선택한 나의 길도 붓다처럼, 북극성처럼, 길 잃고 헤매는 사람에게 길잡이가 되어주는 그런 역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들에게 삶의 지표가 되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길 서원합니다.

 

보성 정사/시경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