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언의 산실-실각심인당

밀교신문   
입력 : 2020-05-25  | 수정 : 2020-07-01
+ -

진기 10년 경주 건천에 설립된 도량

KakaoTalk_20200525_103038385.png

 
진기 10년은 십이불납(十二不納) 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2년여의 법난(法難)이 최종 마무리된 해이다.
 
앞서 진기 9년 12월 15일 대구지법 제5호 법정에서 개정된 최종 공판에서는 무죄판결이 내려졌으며 진기 10년 4월 13일 고등법원 항소심 기각과 4월 21일 대법원 상고 포기에 따라 법난이 완전히 종결되었다.
 
2년여의 법난 기간을 겪으면서 종단은 한 번 더 성숙의 계기가 되었다. 특히 법난 기간 동안 회당 대종사가 보여준 의연함은 큰 스승으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예로 사건이 종결된 후 이틀 뒤인 4월 23일 분규 사건을 정리하기 위해 모인 스승들은 진상을 밝혀 사건 연루자들을 무고죄로 고발하자는 의견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대종사는 그들을 용서하자고 대중들을 이해시켰다. 그리고 대종사는 종단의 모든 불상사는 참회와 정신으로 소멸 시켜 나가야지 현실법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는 법을 여러 차례 설하시면서, 모든 것은 오로지 종단의 허물이요, 그것을 맡은 책임자의 허물임을 깨닫고 세간법에 의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종교인의 모습이 아님을 강조하셨다.  
 
법난은 사회적으로는 심인불교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 동아일보와 서울신문 등 언론에서는 ‘대구 심인불교 사건 무죄 언도 공판’이라는 제하의 소식을 신속하게 보도했다. 4월 2일 경북애국단체 연합회에서는 심인불교 선교, 회당 대종사를 지도위원에 추대하고 싶다고 알려왔다. 이에 대종사는 원로 스승인 김희옥, 권우일, 손대련 세 명의 스승을 참여시켰다.
 
법난은 자체적으로는 마장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종단 발전의 큰 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회당 대종사는 법난을 계기로 종단 내적 일을 정리하고 교화 상황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았다. 종행정 전반과 교학에 대한 정비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2월 20일 서원가 ‘삼신을 찬원함’, ‘교주 아미타불을 찬원함’, ‘진각님을 찬원함’, ‘마시험을 이기세’, ‘이원진리를 밝힘’ 등 서원가 5곡을 제정하고, 4월 19일 ‘삼신을 찬원함’을 제외한 4곡을 개정했다.
 
이어 재단 본부 및 인회 사무실을 서울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바야흐로 종단의 본부가 서울 시대를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이 작업은 4월 29일 시작되었다.
 
종단 본부의 서울 이전은 대종사가 종행정을 직접 챙기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종단이 중앙으로 무대를 옮겨야 할 만큼 성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전쟁 후 다시 모든 정부 조직이 다시 서울로 가게 됨에 따라 서울의 교단 본부 이전은 시대의 추세였다.
 
회당 대종사는 교단 본부의 서울이전에 대한 단계적 조치로 8월 20일 경북 지구를 제외하고 모든 헌상금을 서울 사무소로 직접 납입하도록 했다.
 
또, 국가적·사회적으로 큰 재난을 당하였을 때의 구호금과 종단 내외적 상부상조를 위한 보조부의, 지역사회의 위로 찬조금 등을 위해 심인당에 제시함을 설치기로 하고 서울 밀각심인당과 대구 희락심인당 두 심인당에 제시함을 시범 운영했다(6월 6일). 교도 가정에 달 수 있는 해인과 서원가 5곡을 인쇄 반포했다(7월 20일).
 
정진하는 법도 다양하게 운용했다. 정해진 시간 동안 정진하는 ‘시간 정진법’과 하루 동안 정진하는 ‘하루 정진법’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1시간 이상의 시간정진을 7회 이상하기도 했다(7월 31일). 정진하는 사람임을 알리기 위해 정진 중에는 붉은 우담화를 왼쪽 가슴에 달게 하고 해인 낭독과 서원가를 부르지 않았으며(8월 1일) 스승은 공식시간 중에 설법을 하지 않고(8월 2일), 스승이 하루 정진할 때는 교도와 같이 해인 낭독과 서원가를 부르지 않고 죽비도 쥐지 않고 희사금도 정리하지 않도록 했다(8월 15일). 그리고 매월 초 1주일간 심학 강공하는 법을 폐지하고 1시간 이상의 시간정진을 7회 이상하도록 했다(10월 14일). 대종사는 종행정에 있어 고리에 근본적으로 배치되지 않는 한 전통이나 풍습 중에서 습관화된 것을 포용하는 작업도 추진했다. 그중의 하나가 역리법(易理法) 사용이다(12월 24일). 진기 9(1955)년 1월 4일부터 십이장성법(十二將聖法)을 도입한 바 있지만 역리 사용을 공식화한 것인 이시기다. 그러나 대종사는 스승과 신교도들의 역리법 집착과 남용을 엄격히 배제했다. 즉 ‘심인’이 모든 법의 기본이고 ‘역리’는 ‘심인’을 다스리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자료에는 “역리는 조화를 쓰게 되니 의타력이다”라고 명확히 했다. 
 
진기 7(1953)년 6월 5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설립한 심인중학교 첫 졸업생이 2월 28일 배출됐다. 이어 7월 27일 대구 대명동에 심인중학교 교사(校舍) 신축 공사를 착공하고 8월 28일 대종사를 비롯한 스승과 신교도들이 참석한 가운에 기공식 강도불사를 봉행했다. 
 
12월 11일에는 재단 회칙에 사감 규정을 제정하고 초대 사감으로 손대련 정사를 임명해 종단의 각종 업무에 대한 책임과 기강을 명확히 해 공사(公私) 기강을 분명히 했다.   
 
이시기 설립된 심인당은 경주 건천심인당(실각심인당)이다.
건천읍은 마른 내에서 비롯된 땅 이름이다. 본래 서면에 속하였으나 1973년 경천읍으로 승격했으며, 현재 인구 1만 명이 조금 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영천∼경주를 잇는 구조곡이 읍의 중앙을 북서에서 남동방향으로 관통하고, 구조곡을 따라 형산강의 지류인 내천이 흐른다. 남쪽에는 벽도산·단석산·주사산을 잇는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으며, 북쪽에는 구미산이 솟아 있다. 경주 시내와 접하고 있고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많으며, 단석산을 중심으로 한 일대가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중앙선과 경부고속도로, 국도가 대구와 경주를 연결한다.
 
문화재로는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 199), 월성 용명리사지 삼층석탑(보물 908), 경주 금척리 고분군(사적 43), 부산성, 김유신장군 기간지주, 신평리 비로자나불·지석묘 등이 있다. 실각심인당과 신경주역과의 거리는 약 8.3㎞ 정도다.
 
4월 1일 설립된 실각심인당 초대 주교는 혜안정(김필연) 스승이다. 혜안정 스승이 진기 52(1998)년 5월 14일 기로진원 할 때까지 실각심인당에서 교화와 진을 이어갔다. 진기 18(1964)년 초대 종의회 의원을 시작으로 제2, 4~8대 종의회 의원과 사감위원을 두 번 역임하면서 종단 행정에도 힘을 쏟았다. 진기 72(2018)년 4월 3일 열반했다.
대원심 스승이 보덕심인당에서 부임해 진기 61(2007)년 5월까지 9년간 중생교화와 심인당 발전을 책임졌다. 대원심 스승 후임으로는 선운(정동현)·여원성(최희강) 스승이 임용돼 진기 68년 12월 승원심인당으로 전출 가기전까지 교화에 임했다. 현재는 천안심인당에서 부임해 온 일명지(고정숙) 교화에 매진하고 있다.
 
실각심인당
진기 10년 4월 1일 심인당 사택 신축 개설
             4월 25일 혜안정(김필연) 스승 부임
진기 29년 10월 7일 심인당 개축
진기 52년 5월 12일 혜안정 스승 기로진원
             5월 14일 대원심(김영희) 스승 보덕심인당에서 부임
진기 61년 11월 27일 대원심 스승 덕화심인당으로 전출
                           선운(정동현)·여원성(최희강) 스승 임용
진기 65년 12월 27일 여원성(최희강) 스승 도안심인당 잠시 전출
진기 68년 12월 30일 선운·여원성 스승 승원심인당으로 전출
                           일명지(고정숙) 스승 천안심인당에서 부임

실각심인당 내부.jpg

이재우 기자 san1080@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