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 53.-목욕하다(2)

밀교신문   
입력 : 202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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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목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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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만나는 불상은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공을 들여 조성한 불상을 볼 때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특히 부처님의 피부는 늘 매끄럽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32상 가운데 한 가지 항목으로, 위대한 성자의 신체적 특징 32가지 가운데 ‘피부가 매끄럽고 때가 끼지 않는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신체적 특징을 나열하는 데에 굳이 피부에 때가 끼지 않고 매끄럽다는 것까지 넣을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이 역시 이유가 있습니다.
 
피부에 끼는 때는 번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피부에 먼지나 때가 끼지 않고 매끄럽다는 것은 번뇌를 완전히 벗어버렸고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세세생생 목욕을 아주 열심히 해오셨다는 말일까요? 맞습니다. 하지만 목욕탕이나 강에서의 목욕이 아닌, 지혜로 내면의 목욕을 쉬지 않고 해왔습니다.
‘디가 니까야’에 들어 있는 「위대한 사람의 특징에 관한 경(32상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세세생생 지나오면서 자신의 삶에 가치를 더하기 위해 언제나 현자를 찾아다니며 물었습니다. 그 질문이란, 무엇이 옳은 일이고 무엇이 옳지 않은 일인지, 무엇이 현자들에게 비난받을 짓이고 무엇이 현자들에게 비난 받지 않을 일인지, 어떻게 사는 삶이 바른 삶이고, 가치 있는 삶이며,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삶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언제나 이런 질문을 마음에 품고 지냈고, 현자가 어딘가에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곳으로 한걸음에 나아가서 바른 길을 물었습니다. 그런 행위가 지혜를 안겨주었고, 마침내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전생의 이런 구도행이 매끄럽고 때가 끼지 않은 피부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런 걸 보면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목욕한 사람으로 부처님을 들어도 괜찮을 듯합니다. 당신께서 목욕의 가치를 충분히 알고 계시기 때문일까요? 제자들에게 법문을 들려주실 때에도 목욕의 중요성을 종종 들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머물러 있을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법문을 하셨습니다.
 
“옷감이 심하게 더럽혀져 있으면 아무리 고운 색으로 염색을 하려고 해도 그 빛깔이 나오지 않는다. 바탕이 더러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마음이 번뇌에 물들어 있으면 그에게는 나쁜 길이 기다리고 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염색을 하려면 먼저 옷감이 깨끗해야 합니다. 그런 것처럼 마음이 번뇌에 물들어 있지 않아야 선업을 지을 수 있고, 그에 따라 행복한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우리 마음을 더럽게 물들이는 번뇌로 열여섯 가지를 들고 있는데 탐욕, 악의, 분노, 적의, 모욕, 얕봄, 질투, 인색, 속임, 사기, 완고함, 뻔뻔스러움, 자만, 거만, 허영, 게으름입니다. 이 열여섯 가지 번뇌가 우리 마음을 더럽히고 있다면 제 아무리 기도하고 행복을 바란다 해도 그런 즐거운 결과를 맞이할 리가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마음을 더럽게 물들이고 있는 열여섯 가지 번뇌는 그야말로 마음의 때(垢)입니다. 그렇다면 열여섯 가지 때를 어떻게 씻어낼 수 있을까요? 부처님의 목욕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 마음을 지그시 지켜보면서 마음을 덮고 있는 번뇌가 탐욕인지, 질투인지 허영인지 등등 그 정체를 꿰뚫어 알아차리는 일이 첫 번째입니다. 일단 그 정확한 정체부터 알아내면 그걸 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런 열여섯 가지 번뇌를 버리고 난 뒤에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깨끗한 믿음을 일으키고 수행에 매진하면 더할 수 없는 행복과 맑고 깨끗한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몸을 깨끗하게 씻지 않으면 더러운 때가 끼듯이 마음을 잘 살피지 않으면 이런 때가 잔뜩 끼어서 우리를 지혜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해탈이라는 시원한 경지를 맛보지도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업을 짓게 만들고 타락하게 만들어서 불행한 경지로 나아가게 한다는 법문 끝에 아주 멋지게 결론을 내립니다.
 
“수행자들이여, 이것을 가리켜서 수행하는 사람이 내면의 목욕을 했다고 한다.”
 
기원정사에서 부처님이 이런 가르침을 들려주실 때 그 자리에 있던 스님들은 틀림없이 마음을 샤워하는 청량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 바라문 한 사람이 앉아 있다가 부처님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도 바후까 강으로 목욕하러 가지 않으시나요? 많은 사람들은 바후까 강이 해탈을 안겨준다고 여깁니다. 바후까 강이 공덕을 주기 때문에 그 강에서 사람들은 악업을 씻어냅니다.”
 
이 바라문 이름은 순다리까 바라드와자입니다. 평소 강에서 목욕을 하면 악업이 사라진다는 생각을 굳게 지니며 살고 있던 사람이었지요. 이런 견해에 워낙 강하게 붙들려 있던 사람인지라 부처님 법문이 전혀 결이 다른 데도 아전인수격으로 받아들이고서 엉뚱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분명 그는 곁에서 부처님 법문을 들으면서 ‘아, 이것 좀 봐.
 
이 분도 목욕을 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구나. 맞아. 바로 그거야. 목욕을 해야 악업을 씻어낼 수가 있지.’라고 생각을 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했습니다.
 
“온갖 이름의 강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뛰어들지만 그 강물이 시커먼 악업을 씻어주지는 못합니다. 그 강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쁜 업을 짓고 잔인한 행동을 한 자들을 저 강들은 맑게 씻어주지 못합니다. 진짜 깨끗하게 목욕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압니까? 마음이 청정하고 몸의 행위가 깨끗하며 계를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보아하니 이 사람은 여전히 강물의 목욕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당신의 목욕법을 제안합니다.
“바라문이여, 바로 여기에서 목욕하십시오. 즉,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평화로움을 안겨주는 일, 거짓말을 하지 않고 생명을 해치지 않으며 주지 않은 것을 빼앗지 않고 믿음을 지니고 인색하게 굴지 않는 일이 그대가 해야 할 목욕입니다. 이런 곳에서 목욕을 한다면 우물에서 하는 목욕이나 저 강에서 하는 목욕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맛지마 니까야’「옷감의 비유 경」)
 
평화로움을 안겨주는 일이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우정 어린 마음을 품고(慈心), 그들에게 이로운 일을 하며,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이니, 마음으로 짓는 좋은 일(意業)이지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입으로 짓는 좋은 일(口業)이고, 생명을 해치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는 것은 몸으로 짓는 좋은 일(身業)입니다.
 
몸과 입과 뜻으로 세상을 향해 자애심을 품고 선업을 짓는 일-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목욕법이라는 말입니다. 저 강이 아닌, 바로 여기 부처님의 법문에서 목욕을 하라는 부처님의 이 말씀에 마침내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자기 생각을 버렸습니다. 마음의 때를 씻어내지 않은 채 강물에 목욕을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지요. 이 바라문은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출가했습니다. 날마다 바른 가르침으로 마음의 때를 깨끗하게 씻어내는 내면의 목욕을 하고서 마침내 최고의 성자인 아라한이 되었다고 경에서는 말합니다.
 
이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에게 목욕과 관련해서 들려주신 법문은 『쌍윳따 니까야』에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불에 제사를 지내고 순다리까 강에 들어가 몸에 묻은 검댕이와 재를 씻어내며 복을 빕니다. 목욕을 하려면 나의 가르침을 따라 해보십시오. 계를 지키는 일은 바로 호수에 놓인 나루터요, 그곳을 거쳐서 여덟 가지 바른 길(팔정도)이라는 호수의 물로 목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굳이 온몸을 물로 적시지 않고도 저 열반의 언덕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인도 여행자들은 아무리 바쁜 일정이라도 갠지스강가에 반드시 들릅니다. 그곳에서 이른 새벽 강물로 온몸을 적신 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인도 사람들을 봅니다. 이런 풍경은 분명 2600여 년도 훨씬 더 이전부터 내려온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 풍경은 감동적이지만 강물에 목욕해서 죄를 씻어낸다는 그들의 생각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정작 씻어내야 할 때는 마음의 번뇌라는 때라는 사실을 2600여 년 전에 그토록 간절하게 펼치셨음을 불자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깨끗하게 목욕한 뒤 깔끔한 옷을 입을 때의 상쾌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몸을 씻으면서 부처님의 목욕법도 떠올리기를 권합니다. 마음도 목욕시켜서 선업과 수행이라는 깔끔한 옷을 입는 것이지요. 내 몸에서 풍기는 계행과 선업과 수행의 향기는 나와 세상을 향긋하게 만들고 다음 세상에서도 맑고 깨끗하고 향긋하게 풍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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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마옥경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