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 결혼하다2

밀교신문   
입력 :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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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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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눈물을 흘리며 우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찌나 울어대던지 그의 이름이 아예 ‘늘 운다’라는 뜻의 상제(常啼)입니다. 산스크리트로는 살타파륜이라고 하지요. 왜 우느냐고요? 이유가 좀 특이합니다.
 
자신에게 바른 삶을 위한 가르침을 일러줄 스승을 찾지 못해 웁니다. 하도 울어대니 그 모습이 안타까워 부처님들이 허공에서 소리를 내어 “그대의 스승이 어디에 있다”라고 일러줍니다. 그 말을 듣고 기쁨에 겨워 길을 나섰다가 불현듯 “아차!” 싶지요. 왜냐 하면 기쁜 마음에 달려 나왔지만 정작 어느 방향인지 제대로 여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웁니다. 어휴, 워낙 서글프게 울어대니 허공에서 목소리가 또 들립니다.
 
“동쪽으로 가거라.”
이렇게 일러주면 또 마음에 기쁨이 차올라 한달음에 달려갑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고생 끝에 자신이 평생의 스승으로 모실 분이 계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그 스승님 계신 곳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아, 그런데 이 남자, 갑자기 절망하고 울기 시작합니다.
이유는 또 이렇습니다.
 
스승님에게 나아가려니 무엇인가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두 주머니가 텅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거리에서 구슬프게 흐느끼며 이렇게 외치지요.
“저를 사 가실 분 안계십니까? 저를 사세요. 저를요.”
 
돈이 한 푼도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는 자신의 몸뚱이라도 팔아 돈을 마련해서 그걸로 진리의 스승에게 올릴 공양(선물)을 준비하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이 일을 본다면 참 큰일 날 노릇입니다. 아무리 스승님을 존경한다고 해도 그렇지, 이게 말이 되느냐고요.
하지만 이런 내용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다가가야 합니다. 지금 이 청년 즉 상제는 ‘보살’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보살로 태어났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겠노라고 원을 세웠고, 그 원을 이루기 위해 한 생 한 생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상제보살이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 깨달음으로 세상의 모든 이들을 돕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생명들을 위해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불교신자는 모두 이런 사람이라는 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정신입니다. 스스로를 욕심과 어리석음에 휘감긴 죄악중생이라고 여길지 몰라도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다면 그는 이미 보살인 것이요, 보살은 세상을 위해서 이번 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위해 깨달음을 추구하려고 길을 떠난 상제보살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진리를 일러줄 스승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줄 선물을 마련하지 못해 애태우고 있으니, 이게 또 좀 어처구니없기도 합니다. 그 선물이 대체 뭐라고 이 난리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스승에게 올리는 선물이란 바로 진리에게 바치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진리가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그런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진리를 위해 고스란히 내놓는 것이 ‘공양’입니다.
 
그런데 빈털터리 상제보살은 가진 게 없습니다. 선물을 살 돈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닙니다. 그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라도 내놓아서 진리를 공양하겠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구도심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헐값에라도 팔겠다고 외쳤지만 아무도 상제보살을 사려하지 않았습니다. 상제보살은 그게 또 서러워서 구슬프게 웁니다. 아, 그의 울음은 언제나 끝이 날까요?
울고 울고 또 울고….
 
이런 구슬픈 흐느낌에 제석천이 나섰습니다. 과연 진실한 마음인가, 아니면 잠깐의 마음인지를 알아보겠다는 것이지요. 제석천이 모습을 변장해서 그 앞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내가 사겠소. 그런데 그대가 다 필요하진 않고 그대 심장과 피와 골수만 필요하오. 내게 주겠소?”
 
폭포처럼 흘러내리던 상제보살의 눈물이 이 말에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는 기뻐서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요.
‘드디어 나를 사갈 사람이 생겼구나, 이제 나는 진리의 스승님에게 내 마음을 담아 공양을 올릴 수 있게 되었어.’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칼로 자신의 몸을 찔렀습니다. 행여 저 사람 마음이 변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서둘렀지요. 그런데, 그런데 바로 이런 처참한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도시에서 제법 부유한 장자의 딸이었습니다. 지난 호에 말씀드렸던 꽃을 들고 나타난 여인과 비슷한 뉘앙스이지요?
그 장자의 딸은 더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기 전에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가서 물었지요.
“대체 무엇을 구하려고 이런 일을 저지르십니까?”
 
상제보살은 이 낯선 젊은 여인에게 자신의 사정을 들려줍니다. 장자의 딸이 다시 물었습니다.
“자신의 심장과 피를 공양하면 어떤 이익이 생기나요?”
젊은 남성인 상제보살이 답합니다.
“스승님이 나를 위해 반야바라밀다를 들려주실 것입니다. 나는 그 가르침을 배워서 모든 중생들에게 베풀어 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장자의 딸이 크게 감동합니다.
“내가 재산을 내놓고 당신을 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자신의 몸을 해치는 일은 그만 두세요. 나도 당신과 함께 그 진리의 스승 앞으로 나아가서 훌륭한 선(善)의 뿌리를 심고 싶습니다.”
 
장자의 딸이 이렇게 말하자 그제야 제석천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찬탄하면서 상제보살의 몸에 난 상처를 씻은 듯이 치유해줍니다.
이제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여인은 자기 집으로 상제보살을 이끕니다. 부모님에게 이 사정을 잘 말씀드려 앞서 약속한 재물을 달라고 청하자는 것이지요. 빈털터리 구도자 상제보살은 장자의 딸과 함께 그 집으로 향합니다. 이 여인의 부모는 진리를 추구하는 젊은이의 용기에 크게 감동을 하고, 자신들도 함께 스승에게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 뿐인가요? 이 젊은 여인을 시중들던 5백 명의 여인들도 모두 함께 진리의 스승에게 나아가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반야부 계통 경전 가운데 최초기에 성립되었다고 하는 <팔천송 반야경>끝부분에 실려 있습니다. 이 경에서는 ‘결혼’이라는 말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젊은 남자의 진지하고 뜨거운 구도심과 그 순박한 모습에 마음이 움직인 젊은 여인의 만남은 저절로 ‘결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너무 종교적인가요?
 
그렇다면 이렇게 대비를 해가면서 생각해보기로 하지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무엇인가를 이루기로 한 남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꿈을 이루기에 가진 것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꿈은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모습을 본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진지하고 열정적이고 순박한 마음에 반합니다. 자신 역시 그 꿈에 동참하기로 합니다. 단순한 동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현실적으로 그 꿈을 이루게 해줍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꿈의 실현자가 됩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결혼은 바로 이런 차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무슨 거창한 목표 같은 게 아니어도 그만입니다.
“당신은 왜 나와 결혼했어?”
 
이렇게 질문을 받았을 때 무어라고 대답하십니까?“당신의 그 생각이 좋았기 때문이야. 당신의 그 마음, 당신의 그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 온전하게 인생을 잘 가꾸며 살고 싶다는 그 마음에 반했고, 나는 당신의 그 소망을 함께 하고 싶었어, 그래서 당신의 인생과 악수를 한 것이지.”
이런 대답이라면, 그 결혼, 꽤 멋지지 않을까요?
 
비록 종교적인 색채가 너무 진해서 현실적이지 않기는 해도, 꿈을 향해 나아가다 진한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을 닦아주는 길동무를 만나는 일이 불교에서 말하는 결혼인 것이지요.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가 아니라, 인생의 길동무를 만나는 참 좋은 기회니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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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마옥경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