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약속하다

밀교신문   
입력 : 2019-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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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으로 약속하는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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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해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우리는 말합니다.
 
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을 서로 세워 도장을 꾹 찍고, 그것만으로도 불안해서 서로의 손바닥을 문지르며 복사를 하고 스캔까지 해야 안심이 됩니다.
 
‘약속’이란 말을 자꾸 강조하는 건 그만큼 이 약속이 허언(虛言)이 될 우려가 매우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약속 자체가 꼭 지키겠다는 다짐인데, 그걸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 하는 현대인들, 약속이란 깨지게 마련이라는 걸 전제하기라도 하는 것만 같아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그저 상대방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 약속을 지키지는 못한다는 말일까요?
 
경전을 보면 부처님도 사람들과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새끼손가락을 거는 일 같은 건 처음부터 없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하겠다”라는 언표조차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당신의 입으로 한 말은 반드시 지킵니다. 부처님의 약속 방법을 알아볼까요?
석가모니 부처님 말년의 일입니다.
 
경제적으로 매우 번영한 바이샬리 도시에 살고 있던 암바팔리는 부처님이 수많은 수행자와 함께 자신의 망고 숲에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암바팔리는 고급창부였습니다. 도시의 권력가와 재력가에게 유희를 제공하고 막대한 부를 챙기며 살고 있는 여인이지요. 여색을 탐하는 권력가의 비위를 맞춰 자신의 이익을 챙겨야 하는 여인이라면 그 삶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자를 만날 때면 그저 화려하고 관능적인 겉모습만을 보여줘야 하고, 맑은 정신이 아닌 술에 취한 ‘고객’이 함부로 자신을 대해도 웃음으로 무마해야 합니다. 그럴수록 더욱 술을 권하고 더욱 웃음을 팔아야 하겠지요.
 
게다가 자신의 매력이 바이샬리 사내들을 단 한 사람도 흔들지 못할 때가 머지않아 오리라는 사실도 그녀는 의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저 젊어 한 때, 악착같이 돈을 모아 그 돈으로 노년을 보낼 생각에 헛헛한 마음을 품으며 지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암바팔리는 자신의 망고나무 숲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마차를 타고 망고 숲으로 달려갔습니다.
 
암바팔리가 예를 갖추어 인사를 마치자, 부처님은 그녀에게 어렵고 힘들게 벌어들인 재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공덕을 짓도록, 인생에서 값진 일을 하라고 권합니다. 그 일은 바로 널리 베푸는 보시행이요, 틈틈이 수행자를 찾아 법문을 청해 들어서 지혜의 싹을 틔우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욕정과 관능에 젖어 허망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그 삶이 고귀해지도록 조언해주시는 부처님의 음성은 감로와 같았습니다. 암바팔리는 기쁨에 넘쳐 부처님에게 이렇게 청했습니다.
 
“세존이시여, 내일 아침에 저 스님들과 함께 제 집으로 오시겠습니까? 제가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부처님은 그 요청을 듣고 침묵하십니다. 부처님의 침묵은 승낙의 표현입니다. 경전에서 부처님은 많은 사람들의 공양청을 받거나 어떤 제안을 받을 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씀으로 승낙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요청이나 제안에 응할 수 있는 형편이라면 그저 잠잠히 침묵하며 계십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부처님이 허락하신 줄 알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다”라고 경전에서는 말합니다. 단, 사정이 있어 약속을 할 수 없을 경우는 부처님은 이렇게 분명하게 언표합니다
 
“이미 다른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은 지킬 수가 없습니다.”
 
지킬 수 있는 경우는 침묵으로, 지킬 수 없는 경우는 말로 거절 의사를 분명하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침묵을 지키시자 그 뜻을 알아차린 암바팔리는 그 즉시 수레에 올라타고 전속력을 다해 숲을 빠져나갔습니다. 공양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침 바이샬리에 살고 있는 세도가 2세들도 부처님이 암바팔리 망고숲에 와서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경전에서 그려진 정황을 보자니 요즘으로 말하면 재벌 2, 3세 정도라고나 해야 할까요? 재산뿐만 아니라 권력까지도 거머쥐었으니 그야말로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젊은이들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토록 큰 도시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 역시 부처님에게 몰려갔습니다.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드러내는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서 각자 수레에 올라 망고숲으로 향했지요. 그 모습이 어찌나 장관인지 부처님도 이들을 멀리서 보고 “하늘의 신과도 같구나”라고 감탄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좁은 숲길에서 저들의 수레는 멈췄습니다. 막 부처님과 내일 아침 공양청 약속을 한 창부 암바팔리가 거침없이 수레를 몰고 나오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가까스로 충돌을 피한 젊은이들이 호통을 쳤습니다.
 
“어디 감히 앞길을 막는 게냐!”
 
암바팔리 역시 황급히 수레를 세웠고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들이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부처님 공양을 양보하시오. 그러면 당신에게 10만 배로 보답하겠소.”
 
그러나 암바팔리는 거부합니다. 이 바이샬리를 통째로 내게 넘겨준다고 해도 부처님과의 공양청 약속만큼은 넘겨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권력과 재력을 거머쥔 청년들은 하는 수 없이 부처님에게 나아가 간절하게 청합니다.
 
“내일 아침 저희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저희의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저 암바팔리와의 약속은 그만두시고 저희 집으로 와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미 암바팔리와 약속을 했습니다.”
 
부처님의 이 한 마디에 청년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제자들과 함께 암바팔리 집으로 가셔서 그녀가 정성스럽게 차린 공양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전날 숲에서 들려준 이야기보다 한층 나아간 법문을 들려주었고, 암바팔리는 본격적인 수행의 길에 들어서기로 다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초기경전인 <대반열반경> 등에 실려 있습니다.
 
침묵으로 받아들인 단 한 번의 공양 약속, 그 약속을 통해서 허무하게 살아가던 매춘부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됐습니다. 만일 부처님이 고급창부였던 암바팔리와의 약속을 깨고 바이샬리 권력자들과 약속을 거행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부처님 눈에는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당신 앞에 있는 그 사람에게 지금 가장 절박한 것이 무엇인지가 가장 중요했을 것이고, 그 사람의 삶에 보람을 주는 일이라면 어떤 약속이라도 하는 분이 부처님입니다.
 
먹고 사느라고 바빠서 선한 일을 하지 못하고, 내 이익을 챙기느라 세상을 위한 희생과 양보에는 질끈 눈을 감게 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다 내놓고 가장 올바르고 가장 완벽한 정의와 행복을 달성한 부처님과 성자의 삶을 동경하기만 합니다. 부처님의 삶이 바람직한 줄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의 제약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은 성자에게 정성스레 음식을 올리는 일로 그 마음을 표합니다. 올바른 수행자에게 음식공양을 올리는 일은 커다란 공덕을 짓는 일이라 여기는 까닭에 특별할 것이 없는 공양청 약속이라 해도 보통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담습니다.
 
이런 막중한 약속을 부처님은 그저 덤덤히 침묵으로 받아들입니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도장을 찍지도 않고 조건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 지금의 요청이나 제안이 얼마나 절박한 줄 잘 알고 있기에 그저 조용히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으로 부처님과 중생의 약속은 이뤄졌고, 또 실현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부처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꼭 지킵니다. 설령 약속을 먼저 한 재가신자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부처님은 약속을 지킵니다. 다음의 경우에도 어김없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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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마옥경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