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비워내다(2)

밀교신문   
입력 : 2019-06-24 
+ -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차라리 쉬웠다

20190604092036_e77097b1e24ef6cdf91919812b2535d6_ijrd.jpg

 
아주 모처럼 법정스님의 책 ‘무소유’를 책꽂이에서 꺼내들고 이른 아침,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습니다.
 
표제작인 ‘무소유’를 만났습니다. 소중하게 여기며 가꿔오던 난분 2개 이야기지요. 혼자 사는 처지라 생명이 있는 것이라고는 난초뿐이었고, 적적한 삶에 애정을 기울여 돌볼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난초가 자신을 무척이나 얽어매던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을 스님은 알아차립니다. 난초에 기울이던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하는 생각마저 할 정도입니다. 소중한 이를 만나기 위해 집을 비울 때에도 언제나 그 난분에 생각이 미처 허둥지둥 돌아와야 했습니다. 스님은 아무 것도 지니지 않고 오직 진리를 위해 살아가야 할 사람인데 뜻밖에도 아주 지독하게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었음을 깨달은 찰나, 그 소중한 난분을 지인에게 건네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어쩌면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물건이라고는 딱 난분 하나뿐이었을 텐데, 그걸 주어버린 뒤 스님은 더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요. 길지 않은 에세이 ‘무소유’에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욕망이 어떤 폐해를 불러오는지를 통찰하며,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이 글은 1971년에 쓰였습니다.
 
1971년이라–.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라는 노래가 이른 아침, 고요한 대기를 부수며 온 마을을 두드렸고, 사람들은 눈을 비비고 일어나기 무섭게 삽과 빗자루를 들고 집밖으로 나갔던 시기입니다. 1970년에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어 온 세상이 성장과 발전, 번영과 풍요를 향해 브레이크 없는 기차를 몰고 나아갈 때, 그 1년 뒤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은 참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슷한 것이 집에 있어도, 색깔이 조금 다르고, 디자인이 조금 다르고, 한 벌 가지고는 안 되니까, 그리고 싸니까 우리는 또 사들입니다. 옷뿐만 아닙니다. 무엇이든 사들입니다. 그리고 사들인 물건을 아무에게나 줘버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버립니다. 어느 사이 집에는 언제 어디에서 얼마를 주고 사들였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 물건들로 가득 차고, 결국 집은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로 가득 차서 편안히 쉴 공간을 주인에게 내주지 않게 되었습니다.
 
법정스님의 난분은 그나마 괜찮습니다. 유일무이한 물건, 그 한 가지를 앞에 두면 그를 향한 집착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욕과 집착을 반성할 여지가 넘칩니다. 그런데 스님의 ‘무소유’ 이후 근 5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180여 년 전 괴테는 세상이 너무 빨리 돌아간다며 친구에게 투덜대는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도를 넘었다. 아무도 자신이 어디에서 헤매는지 알지 못한다. 젊은이들은 시간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다. 세계가 부와 빠름을 찬양하고 모두가 그것을 추구한다. 교양 있는 세계의 목표가 된 물불 가리지 않는 커뮤니케이션의 용이함은 지나칠 정도다.”(슈테판 클라인 <시간의 놀라운 발견> 중에서)
 
괴테의 말처럼 우리는 무엇을 쌓아두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계속 쌓아가며 살고 있습니다. 무엇을 지니고 싶은지도 모른 채 계속 바라며 살고 있습니다. 무엇에 붙들려서 옴짝달싹하지도 못하는지, 나를 얽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정체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 무엇인가’에 지배당하여 허덕이며 살고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소유했음에도 ‘아직’이라고 말합니다. 소비에 따른 빚을 감당할 길이 없음에도 ‘이것도 못 산다면…’ 자신의 삶이 너무 허망하다며 카드를 긋습니다.
가난하다고 호소하지만 집안을 들여다보면 가득 차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배달해서 먹는 음식으로 몸속도 가득 차 있습니다. 부자들만 탐욕스러운 게 아닙니다. 탐욕은 재산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습니다. 탐욕의 지배를 받으면 소유하지 못해 안달복달합니다. 소유하면 움켜쥐려고 힘을 줍니다. 힘을 주려니 체력이 받쳐주지 못해 아무 것이나 먹어댑니다.
 
탐욕이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하고 근심하게 하고 재난이 되는지를 부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장자여, 굶주린 개에게 살점이나 근육 한 점 없는 뼈다귀를 던져준다고 합시다. 그 개는 미친 듯이 뼈를 씹고 핥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개의 허기가 지워지겠습니까? 굶주림은 더 지독해질 것입니다. 한 마리 독수리가 조그마한 고기조각을 물고 날아가는데 다른 새가 날아와 그것을 빼앗으려고 그 독수리를 쪼아댄다고 합시다. 재빨리 고기조각을 놓지 않으면 그 독수리는 죽거나 죽음에 이를 정도로 괴로울 것입니다.”(맛지마 니까야 <뽀딸리야경> 중에서)
 
결국 탐욕이란 것은 우리를 더 힘들게 하고 더 가난하게 만들고 더 지치게 만들고 심지어는 괴로움과 절망 속에서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이 말씀을 읽었을 때는 그런가보다 하며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집안을 가득 채운 잡동사니를 들춰내고 비워가면서 그 말씀이 찌르르 와 닿았습니다. 움켜쥐면 풍요로울 줄 알았는데, 세상이란 것이 움켜쥐면 움켜쥘수록 힘만 들어가고 더 허기졌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살점 하나 없는 뼈다귀를 계속 핥고 있는 개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핥을수록 배가 고파졌습니다. 입에 문 고기조각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독수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까짓 것 놓아버리면 그만인데 죽는 줄도 모르고 입에 꽉 물고 있었습니다.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좀 덜어내고 비워내야 합니다. 
 
그런데 과감히 자신이 지니고 있는 물품들을 비워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작정하고 집안을 휘둘러보고 버려야 할 물건들을 찾아냅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물건을 비운다는 일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 일에 나선 사람들 대부분이 몸이 아파집니다. 그게 참 묘합니다. 말할 수 없이 피곤하고 지쳐 나가떨어집니다. 바로 물건들에게 에너지를 빼앗기기 때문이라고 나는 진단합니다.
 
두 눈 감고 불필요한 것을 확 버려버리면 그만이지만, 쉽게 그리 하지 못합니다. 이 물건은 이래서 버리기 아깝고, 저 물건은 저래서 버릴 수 없고, 그 물건은 그래서 좀 더 둬봐야 하고….
 
그 물건이 뭐라고 품에서 내놓지를 못합니다. 집밖으로 내놓지 못합니다. 하다못해 오래 전에 폐업한 동네 치킨집의 쿠폰도 시원하게 털어버리기까지 망설입니다. 끼적거리다 만 메모지도, 누렇게 얼룩이 진 손수건도, 신을 때마다 발이 아파서 고생시키던 신발도, 어느 사이 청년이 되어버린 우리 아이가 예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도….
 
탐욕이란 것은 거창하고 값비싼 것을 바라는 욕심만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버리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무엇이든 채워 넣으려는 마음입니다.
 
집안의 잡동사니를 비워내 본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얼마나 물욕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내가 소비에 집착해서 무엇을 위로받고 싶어 했는지 똑똑하게 보았습니다.”
 
“내가 과거의 어떤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물건을 비워내기 위해 자신의 보금자리를 파헤치며 우리가 무엇을 쌓고 모으며 살아왔는지 그 정체를 직면하면서 사람들은 현자가 되어갑니다. 탐욕이라는 번뇌를 마주하면서 그 번뇌에 지배당한 자신의 초라하고 어처구니없는 현재 삶에 전율합니다. 과감하게 싹 버린 뒤 다시 물건을 신나게 사들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물건에 집착하고 탐하는, 자기 속에 웅크리고 있던 그 욕망을 사람들은 마주 대합니다.
 
그런 것인가 봅니다. 마음공부를 해야 비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집안을 채우고 있는 물건들을 비워내면서 마음공부를 해가는 것인가 봅니다.(계속)
7면- 비워내다2 삽화.jpg
삽화=마옥경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