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가만히 들여다 보는 경전-기다리다(2)

밀교신문   
입력 : 2019-03-25  | 수정 : 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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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품팔이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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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속가 이복동생 난다는 수행자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싫었지만 이제는 맘을 바꿨습니다. 수행을 하면 세속에서 살 때보다 더 즐겁고 유쾌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부처님과 함께 천상에 올라가서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아름다워 자나 깨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아내 손타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 천상의 여인들 모습이 아른거렸습니다. 그 여인들과 다음 생에 즐기려면 지금부터 쉬지 않고 수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주변 도반들에게도 말했습니다.
 
“세존께서 내게 약속하셨습니다. 다음 생에 5백 명이나 되는 하늘여인들과 즐겁게 지낼 수 있으니 부지런히 수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스님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수행이 뭔지도 모르는 저 난다 스님이 딱하기 짝이 없었지요. 스님들은 난다를 조롱했습니다.
 
“난다 스님은 마치 품삯을 받으려고 부처님에게서 고용되어 날품팔이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결국 그대의 수행은 5백 명의 하늘 여인을 얻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단 말이지요?”
 
스님들은 난다를 ‘날품팔이 수행자’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난다는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몰랐습니다. 평생 젊고 예쁜 여인들과 유쾌하게 즐기며 사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라 여겨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면 바로 자신이 그렇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부처님이 약속을 하셨고, 그래서 자신도 열심히 수행하는데 말이지요.
 
이런 난다를 조용히 지켜보시던 부처님은 어느 날 그를 데리고 지옥세계로 데려가셨습니다. 지옥에서는 커다란 구리 가마솥에 물이 가득 담긴 채 시뻘건 불길 속에서 끓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난다에게 그 솥가마를 보여주신 뒤 말씀하셨습니다.
 
“난다야, 옥졸에게 가서 이 구리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물을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물어보아라.”
 
난다가 옥졸에게 다가가 묻자 옥졸이 답했습니다.
 
“부처님에게는 속가에 이복동생 난다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이렇게 물을 끓이고 있습니다.”
 
난다는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못 들었습니까? 그 사람은 5백 명의 하늘여인들과 천상에서 즐겁게 살기 위해 지금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요.”
 
옥졸이 말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천상의 세계에서 목숨이 다하면 이곳에 태어날 것입니다.”
 
난다는 자신의 운명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천상에서 하늘 여인들과 즐겁게 사는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 쾌락이 끝나면 또다시 이런 괴로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정녕 하늘여인들과의 유희는 그토록 속절없다면 내가 무엇 하러 그 즐거움을 바라겠는가?’
 
난다는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부처님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난다의 팔을 붙잡고 다시 수행처로 돌아왔습니다.
 
수행처로 돌아온 난다는 그제야 왜 도반들이 자신을 ‘날품팔이’라고 불렀는지 알아차렸습니다. 천상에 태어나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굳이 출가해서 수행까지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선한 업을 지으면 당연히 행복한 과보가 따라오는 법. 속가에 머물면서 보시하고 오계를 잘 지키면서 살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선업에 따른 즐거운 과보가 과연 얼마나 오래가는 것인지, 그걸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오래오래 즐겁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만 생각했지, 그 즐거움도 끝나게 마련이고 그때가 되면 마치 처음인 양 또다시 생로병사에 시달리며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휘말려서 악업을 지을 것이요, 악업에 따른 괴로운 과보에 끝도 없이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때는 청초하고 아름답고 매혹적인 하늘여인 5백 명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선악업이 무르익어 과보가 찾아오면 그 과보를 받을 뿐입니다.
 
수행이란 것은 그런 악순환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얻기 위함입니다. 깨지지 않고 변하지 않고 허물이 없는 행복한 경지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여태 난다는 수행이란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조용한 인도로 그는 천상과 지옥을 둘러봤습니다. 윤회하는 세계의 한계란 바로 그런 것임을 절감한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도반 스님들이 그가 지나가면 “저기 품삯을 받고 수행하는 날품팔이가 지나간다”며 수군대는 것도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천상의 즐거움도 덧없고, 지옥의 괴로움은 무섭기만 했습니다. 그 어느 곳에도 마음을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차츰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홀로 조용한 곳을 찾아가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화려한 궁전에서 기름진 음식과 젊고 예쁜 무희들에 둘러싸여 지내던 삶이 떠올랐습니다. 그 삶 끝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쾌락의 덧없음, 그리고 그에 젖어 지내느라 선한 업도 변변히 짓지 못하고, 권력만 부리며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악업만 일삼는 자신의 어리석음이 펼쳐졌습니다.
 
그는 나무 아래에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미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품었던 것들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못할 수도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쾌락에서 그의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떠났습니다. 하지만 더 깨끗하고 맑고 충만한 즐거움이 일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가뿐해지자 그는 부처님이 그토록 자주 말씀하시던 선정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갔습니다. 선정의 단계를 밟아 오르자 마음은 지혜를 향했고, 그는 그 지혜의 단계를 하나씩 오르면서…. 마침내 모든 번뇌를 버리고 떠난 성자가 되었습니다.
아라한이 된 것입니다.
 
난다는 부처님 제자로서 이를 수 있는 가장 높고 깊은 경지에 올랐습니다. 그는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세존께서 제게 지난 날 약속하셨지요. 그런데 그 약속을 제가 버리려고 합니다. 세존께서는 제게 5백 명의 여인들을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 덕분에 지금 제가 아라한이 됐습니다. 이제 세존의 약속에서 저는 벗어나게 됐습니다.”
부처님은 난다의 그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쾌락이 삶의 전부였던 속가의 이복동생, 출가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마음을 태우던 난다는 모두가 존경하고 우러르는 성자가 됐습니다. 그러기까지 난다를 바라보고 지켜보던 부처님의 마음은 어땠을지 상상해봅니다. 정작 당사자는 태평했지만 스승인 부처님은 한없이 걱정하셨을지도 모릅니다.
 
맘 같아서는 왜 그렇게 애착을 떠나지 못하느냐고 매섭게 야단을 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교육방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를 인도하였지만 기다렸습니다. 그 스스로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진리의 세계로 뚜벅뚜벅 걸어갈 때까지 부처님은 기다려줬습니다.
 
연꽃이 피지 않는다고 꽃봉오리를 강제로 열 수는 없습니다. 수면 위로 빨리 고개를 내밀라고 물속의 꽃봉오리를 억지로 끌어올려서도 안 됩니다. 그저 꽃봉오리가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활짝 꽃을 피우도록 유도하기만 하면 그뿐입니다.
 
꽃을 피우고 안 피우고는 전적으로 그 자신의 몫입니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갔다고, 너는 왜 그 길을 따라서 걸어오지 못하느냐고 안달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불본행집경> 속 난다의 일화를 읽을 때마다 스승의 역할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부모의 역할도 다르지 않겠지요. 기다려주는 것, 맑은 지혜의 물을 조용히 불어넣어주되 스스로 꽃을 피울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기다림의 가장 아름다운 예가 아닐까요.
그 기다림이 있었기에 부처님은 이렇게 수많은 제자들에게 언표할 수 있었습니다.
 
“비구들이여, 나의 성문 제자 가운데 자신의 감각기관을 잘 다스린 사람으로 으뜸가는 이는 난다비구다.”
 
여전히 난다 스님을 품삯 받고 수행하는 날품팔이라고 놀려대던 도반들이 한순간에 조롱을 거두었음을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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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