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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밀교와 법문사

정유제 기자   
입력 : 2003-12-16  | 수정 : 200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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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중배 / 회당학회 총무이사- 동국대 강사 황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큰 발전도모 지궁은 불지사리 공양위한 만다라도량 중국 섬서성 부풍현에 위치하고 있는 법문사는 당대 밀교의 실상을 전해주는 사찰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1987년에 시작된 발굴을 통해 석가모니의 불지사리가 모셔져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법문사 지궁에서 발견된 불지사리를 포함한 당시 당 황실에서 보시한 불상, 법기, 다기, 금은기, 유리기물 등의 유물로 인해 거의 1천여 년 넘게 자취를 감췄던 당밀의 실상을 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궁에서 나온 만다라도상은 당대 밀교와 일본 밀교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밀교가 중국으로 들어온 시기는 위진남북조시기이나 선무외, 금강지, 불공 등 세 명의 서역승려가 대일경, 금강정경 등 순밀계통의 경전을 바탕으로 도입한 것은 당 현종 개원연간이다. 이 때서야 비로소 밀교가 계통적이고 조직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정순밀교시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도입된 밀교가 후일 송대에 까지 이어진다. 그 후 장밀의시기라고 부르는 중국의 밀교는 수와 당, 그리고 오대를 지나면서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여기서 법문사가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대명일통지' 권34 '봉상부'에 '당 헌종과 의종이 불골을 맞아들인 곳이다'라고 서술한 것에 있다. 불골이라는 것은 석가의 지골을 한 마디의 말로 함축한 것이다. 여기에다 문헌상에서만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 1980년대에 와서 한쪽이 무너져 내린 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지궁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굴하자 당 황실의 사리공양에 대한 실재모습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양하여 왕조의 안정과 복락을 누리고자 했던 당 황실의 염원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리공양 의식은 당 태종 때 시작돼 지궁이 폐쇄되는 874년까지 30∼40년 간격으로 꾸준히 행해졌다. 그러나 희종 이후 당 황실은 권력을 잃고 존재 자체가 미약해지면서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대규모의 불사는 더 이상 이루어지기 어렵게 됐다. 이 즈음부터 법문사 진신사리의 존재는 역사상에서 잊혀졌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유산이 파손이나 도굴되지 않고 발견됐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법문사 지궁의 법기와 공양물에 조각된 도안이나 그림은 분명 당밀 만다라의 도상이다. 다시 말해 지궁 전체가 불지사리를 공양하기 위한 만다라 도량이었던 것이다. 당대의 밀교는 전래되면서부터 황실의 후원을 받아 발전하였고 함통 12년(871)에 만들어진 사리공양구 등 법문사의 유물을 통해 후기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