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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사에 대한 약술

정유제 기자   
입력 : 2003-12-16  | 수정 : 200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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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혜 / 법문사 스님 한때 궁정사원으로 일컫던 '장안명찰' 지하궁전 발굴로 밀종의 대찰로 명성 법문사는 본래 아육왕사로 칭하였다. 아육왕탑이 있고, 그 가운데 석가모니의 지골사리가 있다고 전하여 명찰이 되었다. 법문사의 설립에 관한 전설은 일찍이 동한의 환제(桓帝), 영제(靈帝)시기에 나오는 것이다. 오직 탑으로서 절이 유명하였다고 한다면, 법문사의 보탑은 늦어도 이 시기에 이미 건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골(佛骨)을 소장한 법문사는 소박하게 불교의 성지로 일컬어지면서 궁정사원(宮廷寺院)이 되었다. 당시 승려는 5천여 명에 이르렀다. 30년에 한 번씩 모두 7차례에 걸쳐 탑을 개방하는데 그 때마다 풍년이 들고 사람들은 화목하였으며, 바람과 비가 순조로웠다고 한다. 법문사는 극성기인 당대로부터 명대 중기에 이르기까지 7, 8세기의 극심한 변화를 거친다. 이 시기의 법문사는 쇠락하여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다. 명대에 수 차례 사찰을 정비하고 수리하였다. 성화 8년(1472)에 대철종을 주조하여 지금도 남아있다. 홍치 18년(1505)에서 정덕 2년(1507) 현지인 장걸 등이 대전을 수리하였다. 이런 가운데 명대에 큰 사건이 발생했다. 당대에 건축된 4층 목탑이 끝내 썩어 무너진 것이다. 탑이 무너진 후 사람들의 폭넓은 관심을 이끌었다. 당시 어떤 사람이 탑 아래 지궁을 개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궁 내에 소장된 진귀한 보배와 불사리는 결코 건드리지 않았으며 탑의 수리문제만 언급했을 뿐이다. 그 후 만력 7년(1579)에 이르러 현지의 향민들이 자금을 조성하여 진신보탑을 중건한다. 견고하고 내구성을 갖추게 하기 위하여 8각의 13층 전탑으로 쌓았다. 이것이 1980년대 초의 진신보탑이다. 이후 청대에 이르러 지진으로 탑신이 서쪽으로 기울었다. 법문사 진신보탑은 절 안의 핵심적인 건축물이며 불사의 중심이다. 1987년 4월 2일, 이때는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시간이었다. 당시 탑기를 정리하느라 바쁜 과정에서 지표에 1미터 정도 깊이의 균열이 발견됐던 것이다. 즉, 후에 알게된 지궁의 후실 우물덮개였던 것이다. 지궁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지궁의 4과 불지사리 주위에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화려한 대량의 진귀한 문물들이 있었다. 이러한 물품은 대부분 당대 황실에서 사리를 맞아들일 때 공양한 것들이다. 금은기가 121건(조), 구리 8건, 유리 20건, 자기 16건, 석각 11건, 철기 16건, 칠목기와 잡기 19건, 옥기 400건, 비단직물 수 백여 건 등이다. 문물은 기본적으로 사리를 둘러싼 것으로 아육왕탑·팔중보함을 중심으로 지궁의 전실, 중실과 후실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후실의 분량이 가장 많아 상하로 쌓여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