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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에게 등을 돌려라?

편집부   
입력 : 2015-09-01  | 수정 : 201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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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에는 자성동이 풋살대회가 한창이었습니다. 중등부 4강전으로 서울교구 대표팀과 대전교구 대표팀과의 경기입니다. 후반 5분여 정도 남은 상황에서 서울교구팀이 1:0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전반적으로 전력이 뒤져 보이는 서울팀이지만 운 좋게 게임은 리드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서울팀의 파울(반칙) 개수가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문전 혼전에서 주심은 여지없이 휘슬을 불어댑니다. 정당한 몸싸움이었을 법 한데도 주심은 지고 있는 대전팀에게 훨씬 자비로워 보입니다. 서울팀의 눈물겨운 선방이 있었지만 결국은 문전 앞 반칙으로 인한 프리킥으로 동점 골을 허용합니다. 이어 경기종료 1분여를 남겨놓고 역전골을 내줍니다. 경기는 2:1, 서울교구팀이 역전패하고 맙니다. 경기가 끝난 후 아쉬웠던 마음에 주심의 일방적인 반칙 지적과 너무 엄격했던 5m 안전거리 적용에 대해서 편파적이었다며 문제점을 제기해봅니다. 그런데 같은 서울교구 동료 스승님들조차 반응은 오히려 생각 밖입니다. 잘 싸웠지만, 상대가 더 강했다는 반응들 일색입니다. 그런 시큰둥한 반응들이 순간 ‘주심의 판정이 공정했었나?’ ‘오히려 내 생각이 편파적이었고 문제가 있었던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합니다.

철학자 니체는 말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에게 등을 돌려라!” 이는 ‘이웃사랑’의 통상적 가르침을 비판한 말로써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진정한 자비의 의미를 재규정하고 시대적 가치개념에 대한 일갈(一喝)이기도 합니다.

‘이웃’이란 가까이 있는 이들입니다. 이는 통상적 개념인 공간적 이웃(같은 고향, 같은 학교 등)만을 뜻하는 것을 넘어서, ‘핏줄’이 가까운 이들, 사고방식이 비슷한 이들, 취미나 하는 일이 비슷한 사람들 또한 모두 이웃입니다. 이러한 개념에서의 ‘이웃사랑’이란 자신의 둘레에 동질적인 보호벽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이웃사랑은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 뭉치고 몰려다니며 패거리를 짓고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형성하고 경계선 밖의 사람들을 배척하거나 비난하고 심지어 매장시켜 버리는 행위들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민족주의, 혈통주의, 지역주의, 학벌주의 등의 차별적 집단주의의 다름 아님입니다. 더 문제는 이러한 불평등행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만큼 쉽고, 그렇기에 문제인 줄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로 부르는 소유욕, 이기심, 예속, 숭배, 패거리 형성 등은 진정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차라리 이웃에게 등을 돌리고 먼 곳으로 가서 고독해지는 편을 택하라. 정말 사랑하려거든 너 자신을 스스로 극복하는 사랑을 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발 그대가 머무르는 이웃사랑 좀 그만하고 사랑하려거든 제발 그대의 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낯선 이들을 사랑하기는 어렵고, 경계선 너머에 있는 이들이나 적의 편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건 더더욱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포츠 경기에서 심판은 공정해야 합니다. 심판관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편파판정을 하게 됩니다. 공정성을 잃게 됩니다. 만약 내가 응원하는 팀이 편파판정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면 정말이지 거품을 물일입니다. 판정은 공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비디오 판독 같은 제도를 도입하기도 합니다. 순간의 찰나를 천천히 느린 화면으로 보면서 행여나 있었을 판정의 실수를 찾아내서 바로 잡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삶의 경기현장에서 순간의 판정관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나[我]라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자신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이미 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쳐있기 때문에 세상사 모든 일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최소한 본인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상대는 늘 이기적이고 자기 자신은 늘 손해를 보고 희생만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는 억울해하고 원통해 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 위주로 편파판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자신에게 치우치지 말고 공정하게 판정해야 합니다. 평등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내가 이기적이었고 상대가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한 경우도 참 많습니다. 비디오 판독을 하듯이 천천히 자신의 내면을 순간순간 바라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명상이고 수행입니다. 이렇게 명상을 생활화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은 참으로 살만한 세상입니다.

회당대종사의 가르침입니다.

“원망심을 바꾸어 은혜심을 가지고 집착심을 바꾸어 평등심을 가져야 한다.”(실행론4-8-6) 평등심을 가지라는 말은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너와 나의 경계를 없애버리라는 것입니다. 나[我]의 내면(內面)의 경계선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자비의 실천입니다. 나와 가까운 자와 먼 자, 친한 이와 낯선 이, 내게 호의적인 이와 그렇지 않은 이 간에 차별을 두지 말고, 기쁨을 주거나 슬픔을 덜어주려는 마음을 평등하게 공정하게 가지는 것입니다.

안산심인당 주교 보성 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