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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 참가기>

편집부   
입력 : 2014-12-16  | 수정 : 201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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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붓다여 어디에 계십니까!

늦은 저녁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저편에서 들려 오는 소리, “전수님 이번에 인도 가시렵니까?” 순간 내 머리 속엔 온통 멍하니 예전에 봤던 인도 영화의 OST가 귓전을 맴돌았다. 인도! 인도라! 진짜 갈 수 있는 곳일까! 꿈에나 TV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곳을, 부처님의 나라인 인도를 간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하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기회가 왔을 때 가야 한다며 정사님께서 흔쾌히 힘을 보태주셨다.

그런데 결정을 내리고 보니 벌컥 겁이 났다. 위로 선배 스승님들로, 처음 뵙는 분들까지, 소심하고 가장 막내인 내가 가도 되는 건지, 그분들한테 괜히 누가 되지는 않는지, 떠나기 전부터 걱정과 염려가 밀려왔다. 공항에 도착해서도 선배 스승님들의 포스에 주눅들어 괜스레 히죽 웃어도 보고, 괜히 강한 척 하며 어색함을 달랬다. 열 일곱 분 스승님들과의 이 서먹함으로 어찌 열흘이란 시간을 보낼 건지 많은 걱정이 앞선 것이 사실이었다.

에어인디아(Air India)라는 인도항공은 비행기에서부터 카레 냄새가 코를 진동해왔다. 이륙 후에 제공된 점심식사 역시나 인도식 정통 커리였다. 카레는 태어나서 한번도 먹어본 적 없는 나에겐 첫 번째 시험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이겨내야 하고, 여행에 가서는 현지식을 먹어야 한다는 정사님 의견에 용기를 내었다. 먹을 만 했다. ‘나는 카레를 못 먹어요’ 라는 집착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었다.

홍콩을 경유해서 인도에 도착하니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기는 것은 갖가지 모양의 수인(手印)들 이었다. 부처님의 자내증(自內證)의 덕을 표시하기 위하여 열손가락으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드는 표상이라는 수인(手印)은 처음부터 숨이 탁 막히게 내 가슴을 두드렸다. 커다란 수인(手印)들 앞에서 ‘아 내가 부처님의 나라에 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입국심사를 하기 위해서는 에스커레이터로 내려가야만 했는데,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수인(手印)들 밑으로 내려오면서 ‘하심(下心)’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인도의 첫날은 그렇게 보냈다. 다음날 이른 아침 국내선 항공을 위해 공항으로 달리는 버스 차창 밖으로 본 광경은 TV 뉴스에서 많이 보던 모습들이었다.  오토바이로, 자전거로, 혹은 트럭 짐칸에 빼곡히 가득 서서, 그리고 차 지붕 위에 앉아서 각자의 일터로 바쁘게 가는 사람들의 끝없는 행렬이었다. 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디서나 같은 모습인 거 같았다. 국내선 비행기로 도착한 시바신이 500년을 살았다는 ‘바라나시!’이곳에서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처음으로 설법을 하기 위해 옛날에 함께 고행했던 다섯 비구를 녹야원에서 만났다. 다섯 비구들은 부처님이 고행의 길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처음엔 그를 거부하려 했지만 부처님이 자신들보다 더 뛰어난 내적 안정감과 균형을 발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영불탑에서 부처님을 맞이해서 설법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 크지 않은 ‘사르나트’ 박물관에는 인도의 국가문장인 '4사자상'을 전시해놓았다. 이 '4사자상'은 녹야원의 아소카왕 석주 상단에 있던 것으로 인도화폐에도 새겨져 있다. 아소카왕의 석주를 제외하고는 박물관의 약간은 실망적인 소장품을 보면서 미국의 개인 박물관에서 봤던 많은 불상들과 여러 인도 힌두 문물들이 생각이 났다. 힘이 없어서 아니면 무지해서 자기들의 문물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러나 이는 우리도 뭐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음을 금새 깨달았다. 일본에, 프랑스에, 미국에, 영국에 흩어져 있는 우리 조상님들의 위대한 유산들도 무수히 많음이 다시금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셋째 날, 갠지스강의 일출을 보러 갔다. 갠지스강은 힌두교신자인 인도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강으로 히말라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힌디어로 '강가(Ganga)'로 불리는 갠지스강은 ‘어머니’라는 의미로 인도 힌두교도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강이다. 힌두교의 삶은 태어나 갠지스강에서 세례를 받는 데서 시작해 숨을 거둔 뒤에 화장돼 이 강에 뿌려지는 것으로 끝난다고 한다. 화장한 재를 갠지스강에 뿌리는 것은 성스러운 강물로 영혼이 속죄를 받아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헤르만 헤세가 ‘모든 창조물의 소리들이 이 강물 속에 있소’라고 했듯이 카트라고 불리는 갠지스강가에는 세탁소도 있고, 화장터도 있고, 세례하는 곳도, 씻는 곳도 있었다. 운이 좋게 일출을 보고는 항하사(恒河沙)라 불리는 모래밭도 걸었다. 혹시 운이 좋으면 버려진 부처님의 사리를 찾지 않을까 하는 염원으로 모래를 뒤적거렸다. 바쁜 일정때문에 배에 내려서는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뭔가를 요구하며 손을 내밀고 따라오는 아이들의 발걸음도 우리 발걸음에 맞추어서 같이 빨라 졌다.  건너편에선 학교에 등교하기 위해 깨끗한 교복에 학교버스를 타는 아이들이 보였다. 이쪽의 아이들은 자기보다 더 어린 동생들을 안고서 뭔가를 요구하고 있다.  이쪽 저쪽의 아이들은 서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신분 때문이라 할지 아니면 업이라 생각할지 빠른 걸음 속에서도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 ‘부다가야’로 출발하였다. 기나긴 버스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중간에 휴게소도 없기에 급한 대로 차를 세워 ‘노상방뇨’라는 것을 했다. 우리의 서먹함이 이 엉덩이를 한번 틈과 동시에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로가 이 인도에 영역 표시를 하고 왔다고 당당히 얘기를 하였다. 늦은 오후에 도착한 ‘부다가야!’ 한쪽으론 추수가 끝나고 저녁 준비들을 하는지 짚 태우는 구수함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익숙한 냄새에 어려서 시골 외갓집에 갔던 풍경이 떠올라 정겨웠다. 모든 것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부처님께 첫 공양 유미죽을 올렸던 수자타의 집과 스투파를 돌아본 후 급히 대보리사에 도착하였다. 마하보디 대탑은 탑이라기 보다는 불당으로, 대보리사로 불리기도 하고, 금강좌(金剛座) 사원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수요저녁불사를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나무, 바로 그 보리수 아래서 봉행하였다. 내가 불공을 하고 있는 건지, 부처님이 옆에 계신 것인지 어두움과 함께 내 머릿속도 혼미함으로 가득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응이 마음에 가득함을 느꼈다.

인도에 온지 4일째, 매일 버스로 이동하면서 평야만 보다 드디어 부처님께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하셨던 라지기르의 영축산에 도착하였다. 산꼭대기의 황금빛 사원의 꼭대기가 눈에 거슬렸다. 일본 사찰이라고 한다. 또 그곳엔 곤돌라 시설이 되어 있어 걸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빔비사라왕 마저 수레에서 내려 걸어오르게 했던 부처님의 위의(威儀)를 느껴가며 그 길을 걸어 올라갔다. 또 이곳은 데바닷따가 부처님을 위해(危害)하기 위해 돌을 굴린 곳이기도 하다. 산을 내려와 빔비사라왕의 감옥터와 빔비사라왕이 보시한 죽림정사(竹林精舍)를 보고는 세계 최대, 최고의 불교 대학인 나란다 대학에서 수많은 라마승을 만났다.

끝이 보이지 않게 조그만 문으로 많은 어린 동자승부터 나이 지긋한 라마승, 여자, 남자 라마승들이 비집고 들어 갈 틈이 없도록 끊임없이 줄을 지어 나오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느 정사님이 모든 문제 해결은 염송 밖에 없다는 말씀에 우리 일행은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기 시작했다. 순간 놀란듯한 어린 라마승들이 미소를 띠며 “옴마니반메훔”을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이 같이 염송하면서 자연스럽게 한쪽 길을 열어 주었다. 이들 라마승들은 성지순례 중인데 부처님의 행적을 직접 걸어서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비포장도로에 승차감이 좋지 않다고 투덜거렸던 나의 이 좁은 마음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도하교 중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마하트마간디 세투’다리를 건너 2차 결집지인 ‘바이샬리’에서 대림정사(大林精舍) 터와 부처님의 진신사리탑 터와 원숭이가 망고와 꿀을 공양했다는 원앙봉밀지, 그곳에서 팔만 이천여 개의 아소카왕 석주 중에 온전히 전 모습이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석주 위에는 석가족을 상징하는 사자상이 있는데 그 사자는 ‘쿠시나가르’를 보고 있었다. 발우 모양의 캐서리아탑을 거쳐, 쿠시나가르의 열반당에서 가사공양과 약식불사를 거행한 후 부처님의 다비장 순례를 마쳤다.

여섯째 날, 국경을 넘어 네팔에 들어갔다. 릭샤를 타고 룸비니에 가서 부처님의 족적이 있는 마하대비사원과 구룡못, 아소카왕 석주를 둘러보았다. 대보리사와 열반당에서의 가슴 벅참이랄까 그런 감흥이 없어서였는지 마하대비사원은 그저 그런가 보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적잖은 실망감이 아직도 남아있다. 다시 국경을 넘어 카필라성에서 하루를 자게 되었다. 오지(奧地)라 그런지 밤에는 여우소리가 가득했고 정전도 자주 되었다.

수닷타장자의 집터와 앙굴리마라터를 보고는 부처님의 45년간의 교화세월 동안 가장 오랜 기간 지내셨던 기원정사(祇園精舍)를 방문했다. 수닷타장자가 보시한 거대한 규모의 이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부처님께서는 ‘금강경(金剛經)’을 설하셨고, 그곳에 아난다 보리수라는 것이 있었다. 아난다가 사람들이 부처님을 보듯이 보리수를 보라고 심었다는 나무이다. 마야부인을 위해 도리천에서 설법하시고 내려오신 상카시아 순례를 끝으로 부처님 8대 성지 순례는 끝이 났다.

인도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 중의 1등이라는 인도 가이드의 설명처럼 타지마할 앞에서 우리는 감탄으로 말을 아꼈다. 인류가 이 지상에 남긴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고, 무덤이며, 예술작품이었다. 사랑으로 빚어낸 ‘찬란한 무덤’이라 불리는 타지마할은 새하얀 대리석에 색깔 있는 보석들을 새겨 놓고 시간과 보는 위치에 따라 햇빛과 달빛의 영향으로 다양한 빛을 발하도록 되어 있었다. 가이드 설명이 샤자한은 타지마할이 완성된 직후,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의 손목과 혀를 잘랐다고 했다. 다른 곳에 이런 아름다운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함이라고 했다. 타지마할이 1등이 된 데는 이 인부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각에, 한 사람의 열정이 이런 아름다운 타지마할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사람의 비뚤어진 욕심에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강요되고 묵인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파왔다. 그 욕심에 샤자한은 아들에 의해 아그라성에 갇혀 타지마할만을 멀리서 보며 쓸쓸한 마지막을 맞이했다고 한다.

인도에서의 8일간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한국에 도착하니 공기 마저 시원하고 깨끗함을 느꼈다. 다음날, 대구 심인문화제에서 만난 국악교성곡 ‘회당’ 을 들으면서 흘러 내리는 눈물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가닥을 못 찾고 머릿속에서 뒤엉켜 있었던 부처님의 성지순례가 ‘불법은 체요 세간법은 그림자’라는 종조님의 일대기와 함께 오버랩 되었다. ‘금강원의 죽비소리’에서는 룸비니의 마하대비사원이, ‘새벽을 여는 님이시여’에서는 부다가야의 대보리사가, ‘눈을 뜨라’에서는 녹야원의 영불탑이, ‘옛날에는 의발이요 이제는 심인법이라’에서는 쿠시나가르의 열반당이 그려졌다. 모든 관객들과 함께한 ‘옴마니반메훔’합창은 감동의 최고점! 그 자체였다.

좋은 여행이란 멋있는 곳을 럭셔리 패키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친구와 가는 것이라고 했듯이, 이번 성지순례를 다녀와서는 마음이 가득함을 따뜻해짐을 느꼈다. 활자로만 만났던 부처님의 모습을 직접 보고 나니 가슴이 한번 더 벅찼고, 어눌한 인도 가이드의 설명에 덧붙여서 상세하게 설명해 주신 정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매일 밤마다 당신들의 방에 불러 손수 만든 차로   하루의 심신을 풀어주신 전수님들, 당신의 식량인 컵라면을 흔쾌히 양보해 주신 마스코트정사님, 8일간 물휴지는 혼자서 다 제공해 주신 정사님, 서있기만 하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와서 사진 찍어 주시던 메인 카메라 정사님과 1번 카메라 정사님, 소통할 수 있는 간담회를 마련해 주신 정사님, 마치 쟈스민 공주처럼 인도에서 더 빛을 발한 전수님, 아무 말없이 조용히 화장실 팁을 내주시던 정사님, 단아한 모습으로 그저 미소만 지어주시던 전수님, 모든 이들에게 비타민 물을 내 만들어 주셨던 전수님, 무엇 하나 버릴게 없는 행복한 8박 10일 이었다.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행복한 일정이었다. 이 모든 분들이 부처님의 나라, 인도에선 만난 화신 부처님들이었다. 붓다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안산심인당 교화스승 진여향 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