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턴테이블에 음반을 올려놓습니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아르페지오네는 기타첼로라고 불리는 것으로 이름만이 전해지는 악기입니다. 보통 첼로로 연주되는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즈음에 잘 어울리는 음악입니다. 감미롭고 우아하면서도 비장미까지 감도는 첼로 음색이 소슬한 가을바람을 따라 서서히 폐부를 뚫고 들어옵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항상 그렇습니다. 가랑비에 젖듯 서서히 젖어들다가 문득 소스라치게 한기를 깨닫게 하는 겁니다. 어쩌면 슈베르트의 음악이 철저히 죽음의 명상에 바쳐지는 것이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그 유명한 연가곡 '겨울 나그네'가 그렇고 현악사중주 14번 '죽음과 소녀'도 그렇습니다. 티푸스로 사망하기 육 년 전부터 슈베르트는 항상 죽음의 그림자와 싸워야 했지요. 전기 작가 이덕희가 "영원한 고역에 처해진 비참한 아틀라스"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슈베르트의 삶은 처절했으니까요. 고작 서른 두 해를 사는 동안 600여 곡이 넘는 예술가곡은 물론이고 그 외 수많은 곡들을 작곡했는데도 거의 무명에 가까운 삶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지음(知音)이라고 부를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는데도 말이지요. 오로지 슈베르트의 음악에 대한 사랑으로 굳게 결속되어 있었고 슈베르트의 음악을 세상에 알린다는 마음 하나로 열렬했던 그런 친구들을 가진 슈베르트였으니 그렇게 철저히 불행한 삶은 아니었겠습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을 듣고 있으니 오래 전 여고시절 음악수업시간이 떠오릅니다. 독일가곡을 배우는 시간이었는데 처음 접한 슈베르트의 가곡은 어렵기만 했습니다. 아마도 학교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악명 높은 음악선생님 앞이기에 더했을 겁니다. 유독 노래를 못했던 급우 한 명은 뺨을 맞는 것은 기본이고 교실바닥에 패대기쳐지기까지 했으니까요. 제가 그 분을 기억하는 것은 당시 어느 합창단 지휘자로 활동하셨던 선생님이 주신 음악회 티켓 덕분입니다. 슈베르트의 가곡을 잘 불러서 상으로 주신 거였는데 그때 들었던 마스카니의 오페라 '까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공연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으니까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이나 대중가요나 들을 뿐이었던 제게 고전음악의 세계는 첫사랑의 매혹 그 자체였습니다. 음악들은 단 한 곡도 그냥 스쳐가지 않고 내 안을 관통해가곤 했지요. 제게 있어 음악을 듣는 일은 '내가 알 수 없는 오래된 시간'을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음악은 내 힘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던 죽음과도 같던 청춘의 한 때를 통과해 나올 수 있었던 나침반이기도 했습니다. 첫사랑의 매혹을 거쳐 지극한 열애와도 같았던 그 시절들…. 항시 열정은 식게 마련이고 유희도 싫증나는 순간은 오는 법이지만 문득 생각하니 아름다운 한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젊은 저는 결코 알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또 시간이 흘러 오늘을 회상해보는 날이 온다면 그때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아름다운 날이었는지도 모른다고요. 사실은 모든 날들이 어제 죽어간 사람들은 보지 못한 아름다운 날들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한순간도 겅중겅중 살아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느새 추석이 우리 목전입니다. 유례 없이 혹독한 여름 보내시느라 애쓰셨지요? 지금 우리 앞에 다가와 있는 가을, 충분히 만끽하시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귀향하시고 가족 친지분들과 아름다운 날들 보내시기를 발원합니다.
김혜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