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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밀교는 시대상황적 특징 속에서 전승"

편집부   
입력 : 2013-07-16  | 수정 : 201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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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중국밀교국제학술대회 한국대표 기조연설

한국밀교의 원류와 전개 / 허일범 진각대학원 교수

중국 서안 섬서사범대학 종교연구센터가 주관한 제2회 중국밀교국제학술대회가 6월 27일부터 7월 1일까지 중국 절강성 소흥 용화사와 명심서원 등지서 개최됐다. 당밀부흥과 세계밀교관련협의체 구성방안 등을 논의하고 국제학술교류를 위해 열린 이 대회에서 한국대표로 기조연설을 한 진각대학원 허일범 교수의 논문 '한국밀교의 원류와 전개'를 요약해 싣는다. 격년제로 중국 정부의 국가적 지원 속에 열린 이번 대회에는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대만, 오스트리아, 이스라엘, 러시아 등지의 밀교학자 60명이 참여해 연구분야별 발표를 진행했다. 연구분야는 밀교전적의 문헌학적연구, 밀교유물의 연구, 밀교의식과 문화연구, 지역밀교의 역사와 교류에 대한 연구 등 다양한 분야의 논문이 발표됐다.(편집자)

인도로부터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전파된 밀교는 지역적 상황에 따라서 그 양상을 달리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그 중에서 한국의 밀교는 4세기 후반 불교가 수용된 이래 통불교적인 입장에서 밀교적 요소들이 부각되면서 불교 속의 밀교로 그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한편 티베트나 일본의 밀교는 사자상승의 전통을 중시하며, 확실한 혈맥을 가진 전통밀교의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그 지역의 문화나 역사, 그리고 민족성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티베트의 경우는 지리적으로 인도와 인접해 있는 관계로 인도불교의 수용이 용이하였고, 초전기에 수용되었던 선불교의 쇠퇴는 인도불교의 유입을 가속화시켰다. 그 결과 인도의 중기와 후기불교가 직접 유입되었고, 여기서 티베트밀교는 인도불교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즉 티베트밀교는 인도밀교를 기반으로 한 티베트적 양상을 띤 새로운 형태의 밀교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불교와 밀교 간의 관계를 설정하고, 불교를 토대로 한 밀교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여기서 티베트밀교는 불교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승원의 학습체계에서도 불교의 교육을 마친 자들만이 밀교의 경전을 학습하고, 행법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경우는 6세기 중반 한반도의 불교를 수용하면서 교학적인 기틀을 마련하였고, 9세기 초 입당구법승들이 당나라 밀교의 법맥을 상승하여 진언종과 천태종을 성립시켰다. 여기서 일본밀교는 당나라의 밀교를 기반으로 하여 각 종파의 교학체계를 완성하고, 그에 따른 밀교의 행법을 전승시키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각 지역의 밀교는 수용시기나 형태에 차이가 있으며, 지역적 특성에 따라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각 지역의 밀교는 획일적 기준에 의해서 그 지역 밀교의 존재유무를 판단할 수 없으며, 교리나 수행법이 일치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각 지역에서 전개된 밀교의 특성을 존중하면서 그 지역에 맞는 밀교의 기준을 설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한국밀교의 전개양상을 구분해 보면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타난 구복적 형태의 밀교, '송고승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입당구법승들의 법맥상승밀교, 그리고 '고려사', '진언집' 등의 문헌과 각종유물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전래진언밀교의 영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자생구복적 형태의 밀교는 심오한 경전의 교리를 학습하고, 그것을 실지성취의 단계로 이끌기 위한 수행법보다는 개인의 소원성취나 국가적 안위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런 형태의 밀교는 신라시대의 밀본, 혜통 등에 의한 치병과 제재초복법, 그리고 명랑의 문두루비법과 같은 원적퇴치법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입당구법승들의 법맥상승밀교는 당나라에 유학한 승려들이 '대일경'이나 '금강정경'과 같은 인도전래의 밀교경전을 습득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시대에는 신라에서 현초, 불가사의, 의림 등이 당나라로 구법의 여정을 떠나서 선무외로부터 '대일경'의 교리와 수행법을 전수 받고, 혜초가 금강지와 불공으로부터 '금강정경' 계통의 교리와 행법을 전수한 것을 말한다. 그 후에도 혜일과 오진이 그들의 법을 상승 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들 모두의 행적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 법맥의 전승여부도 단편적인 사실밖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티베트에서 몽골을 거처서 전래된 진언밀교는 고려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형태의 밀교를 말한다. 그것은 수법도량의 개설, 진언차제집의 체계화, 그리고 아사리관상법과 진언종자관상법의 성립 등으로 전개되었다. 즉 한국의 밀교는 법맥의 상승보다는 시대적 상황에 맞는 형태의 밀교로 전개되었다. '삼국유사'에 나타나 있는 밀본이나 혜통, 그리고 명랑의 활동을 보면 지극히 구복적인 양상을 띠고 있으면서도 당시의 왕실이나 국가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밀교를 체계적이 아닌 수행법에 의한 밀교행법으로 보는 경향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경전의 교설을 떠난 행은 아니었다. 또한 법맥상승밀교의 관점에서 보면 조잡한 밀교행법으로 비추어 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법들은 인도의 중기밀교에서도 현세이익의 성취를 위한 행법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출세간적 성취법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구복적 형태의 밀교도 한국밀교의 전개상에서 보면 등한시 될 수 없는 부분이다.

다음으로 통일신라시대 이후 당나라에 들어가서 밀법을 전수 받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인도의 정통법맥을 상승한 인물들로, 당나라의 밀교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인도에서 당나라에 들어가 전법을 하고 있던 선무외와 금강지의 제자가 된 신라의 현초, 불가사의, 의림, 혜초 같은 인물들은 당나라의 혜과나 순효 같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법맥상승밀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법은 훗날 일본밀교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일본의 진언종과 천태종의 교학, 수행체계의 확립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의 활동이 모국인 신라불교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고, 그들의 족적을 찾아 볼 수 없다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하여튼 그들의 구법활동은 어떤 형태로든 한국의 밀교계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의림 같은 경우 고령으로 귀국하여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화엄일색의 불교계에 밀교적 요소들을 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구복적 밀교승들과 구법밀교승들의 활동이 있은 후 고려시대에는 수많은 수법도량들이 개설되었다. 어떤 면에서 그들 도량들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형태의 것들이기 때문에 순수한 밀교행법의 전개로 보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그러나 도량의 명칭이나 목적 등을 보면 밀교 사종수법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여타의 지역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토착화된 고려밀교의 특성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나아가서 이들 도량의 개설과는 거리가 있지만 현존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유물 가운데 밀교적 행법에 활용되는 법구들이나 밀교경전에서 수법에 활용되는 진언종자들이 법구의 제작에 활용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밀교의 특징적 요소들이 다른 형태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서 조선시대에 접어 들면서 불완전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차제집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진언집'과 같은 진언차제집이 편찬되고, 고려시대 이후 전승되고 있는 복장만다라가 조성되어 한국밀교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사원의 건축이나 법구의 제작에서 진언류를 활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조선시대 밀교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한국의 밀교는 일본이나 티베트와 같이 법맥상승의 전통이 아니라 시대상황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밀교의 맥이 전승되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적 한국밀교의 전개는 근세에 들어서 진각종이 창종되었고, 밀교홍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