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31

허일범 교수   
입력 : 2002-06-17  | 수정 : 200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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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자진언과 한글창제 1. 진언승 신미와 한글창제 오늘날 한글창제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그 중에는 한글창제가 범자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설도 있다. 여기서 범자와 한글창제간에 어떤 형태로든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불교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실재로 조선불교통사의 저자 이능화 씨는 한글창제의 범자기원설을 주장하면서 불교와의 관련성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전거를 확실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범자와 한글이 어떤 면에서 관련이 있는지 막연한 상태였다. 그것은 조선시대의 진언승 신미의 행적이 밝혀짐으로써 그 실마리가 풀리게 되었다. 신미는 속리산 복천사의 승려로 세종 때부터 세조에 이르기까지 국왕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왕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과 김씨 가계보에 의하면 김수성 즉 신미는 세종 때 집현전의 학사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세조 때는 왕사로 선교도총섭혜각존자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세조 때에 이르러서부터다. 그는 간경도감의 불전국역에도 참여하였으며, 세조의 측근으로서 왕이 사찰을 순례할 때마다 보필하고, 폐사를 복원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즉 세조에게 오대산 상원사의 복원을 간청하여 전각을 바로 세우고, 그 곳에 문수보살상을 안치하게 한 인물도 신미이다. 그의 행적 중에서 우리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한글창제 당시에 그 자신이 집현전 학사였으며, 불전의 국역사업과 다라니류의 인각을 주관하였다는 것이다. 현 단계에서 그가 집현전 학사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세종 때 그가 왕의 총애를 받는 승려이자 집현전 학사였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어떤 형태로든 한글창제에 관여하였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들은 조선불교통사에서 지적하고 있는 한글의 범자기원설이 집현전 학사 신미의 활동을 전제로 해서 나온 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능화 씨의 지적과 같이 한글이 범자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신미의 활동으로 인도계 문자인 실담이나 티베트문자 등이 한글창제에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티베트문자의 경우는 문자의 조합방식에서 한글과 매우 흡사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한글의 받침에 해당하는 유족자나 후접자, 그리고 재후접자의 조합방식은 한글과 티베트계 문자에서만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들은 신미가 실담문자나 티베트문자에 어느 정도의 식견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부분은 속리산 복천사에 소장되어 있는 한 종류의 복장유물을 보면 분명해진다. 거기에는 신미로부터 전승된 복장유물의 진언과 부적류들이 실담문자와 티베트문자로 쓰여 있다. 그리고 그 철자법은 오자가 발견되지 않으며, 정확한 자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신미가 실담과 티베트문자에 대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이와 같이 신미는 승려로서 뿐만이 아니라 학자로서 인도계 문자와 진언에 능통했던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능화 씨의 한글범자기원설은 설득력을 가지며, 그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 신미의 활약이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신미는 복천사의 개축에 국왕의 보시를 받을 정도였으며, 국왕과는 친밀한 관계에 있었지만 당대에 하위지 등의 유학자들에 의해서 철저히 공격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승려의 신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신록에는 그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기술된 내용들이 여기 저기 발견된다. 하여튼 그는 유가로부터 견제를 받을 정도로 재능이 탁월했던 진언승 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2. 신미의 진언만다라 신미가 실담진언에 능통하고, 법만다라의 제작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상원사 복장유물을 통해서도 입증되었다. 그간 상원사의 문수사리복장진언의 제작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신미의 행적 중에 오대산 상원사의 복원과 문수보살상의 조성에 관여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복장진언류의 제작자가 신미였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또한 속리산 복천사에 소장되어 있는 복장유물에서 발견된 오불종자만다라와 티베트문 진언 등을 통하여 그가 실담과 진언에 밝은 인물이었다는 것도 입증되었다. 우리들은 여기서 신미가 제작한 상원사와 복천사의 복장진언 중에서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복천사와 상원사의 복장진언 사이에 내용상으로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먼저 상원사의 복장진언은 복천사에서 발견되지 않는 금강계삼십칠존 종자만다라와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된 당밀 전승의 진언다라니류들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한편 복천사의 복장진언은 오륜형태의 만다라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출실지, 입실지, 비밀실지등 당밀전승의 진언을 사용하지 않고, 아사리관상진언, 금강수보살진언 등의 진언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복장발원자의 신분을 의식하여 복장진언의 형태를 차별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상원사의 복장유물은 국왕을 위하여 발원한 것이었으며, 복천사의 것은 사대부집 부인의 발원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발원목적도 금강계삼십칠존이 중심이 된 상원사의 것은 국왕의 질병을 금강부의 제존의 힘을 빌어 치유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고, 복천사의 것은 가내평안을 위한 불의 공덕성취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형태적으로 보면 복천사의 복장진언의 경우, 화엄적인 요소가 강한 반면 상원사의 것은 밀교적인 요소가 강화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상원사의 것은 금강계만다라의 형식을 갖춘 법만다라의 종자로 구성된 삼십칠존에 외원을 일체여래사리함진언으로 둘러싸고, 그것을 삼종실지진언과 육자진언이 쓰인 황소폭자로 싼 형태이다. 이에 반하여 복천사의 것은 전통적 복장진언의 양식을 갖춘 오대륜과 오불종자진언을 중심으로하여 비밀실지진언과 일체여래사리함진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신미 스님의 영향에 의해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두 종류의 진언만다라 사이에는 표현방식에서 신분적 고하관계와 발원 목적에 따라서 차별화된 형태로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