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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의 말씀

편집부   
입력 : 2010-04-15  | 수정 : 2010-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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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의, 혹은 미필적 고의의, 혹은 우발적인 사건 사고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우울한 요즘 뉴스를 피해 동네 뒷산을 올랐다. 불과 며칠 사이에 산은 마법에 빠져 있었다. 사랑에 빠져 있었다. 사월 초순의 산은 온통 연두로 분홍으로 노랑으로 물들어 있었다.

진달래는 제 마음인 듯 신의 섭리인 듯 산을 온통 분홍으로 감싸안고 있었다. 세상의 악의와 미필적 고의와 상관없이 분명히 절대적 아름다움은 가까이 저만치 피어 있었다. 다문다문 서 있는 연노랑의 산수유나무며 진개나리 등 윤곽이 뚜렷한 아름다운 얼굴들이 세상을 향해 서 있었다. 세상과 마주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살아가면서 마음이 어두운 순간 새나 고양이나 나무나 꽃이나 살아 있는 다른 존재들이 얼마나 내게 빛이 되어 주었던가. 무엇보다도 사람에게서 얼마나 위로를 받았던가. 새삼스럽게 삼라만상이 귀하게 느껴졌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얼음이 살 속에 박혀 차갑게 서걱거리던 땅에 꽃 천지라니! 조그맣게 실눈을 뜬 노랑 눈망울. 만개한 진분홍의 커다란 눈망울. 이름을 알 수 없는 흰 야생꽃의 순정한 눈망울. 저 꽃들의 첫 순간을 인간은 자신의 가슴에 손가락으로 새겨 넣을 수밖에 없다. 어둠을 뚫고 얼음을 뚫고 대지의 바닥을 치며 올라온 예기치 못한 종소리. 예감 같은 분홍의 말씀을 읽는다.

악인은 없다. 고의는 없다. 사고가, 사건이 있을 뿐이다. 세상은 살만하다. 생명을 웅변하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성명서가 있을까? 진달래 꽃잎 한 장 한 장, 한 문장 한 문장, 생명의 말씀을 간직하며 짧은 가출을 접고 산아래 아파트 단지로 내려왔다. 봄날의 첫 꽃핀 아침.
                                                               
권현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