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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

편집부   
입력 : 2009-10-28  | 수정 : 200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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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그림자의 허리가 짧아지고 있다. 어느새 나무들이 여름날의 수다한 수사(修辭)같은 잎사귀들을 하나 둘 덜어내고 있다. 기나긴 겨울을 나기 위해 몸을 가볍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맘때면 꼭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삶의 실체가 안개 속에 숨어있는 문학소녀였을 때는 이 구절이 조금은 달콤한, 막연한 쓰라림으로 다가왔지만 새삼 가슴이 서늘해지는 문장이다. 노숙자거나 이민자거나 전세, 월세를 내기 어려운 사람 등 존재기반이 허약한 사람이라면,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이라면 가슴이 서늘하다 못해 먹먹해지는 문장일 것이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여전히 존재의 집을 짓고 허무는데 열정을 쏟을 것이고 문학의 말미에서 말미잘처럼 수사에 기대어 살 것이고 수사를 밀고 가느라 애쓸 것이다. 문제는 실체다. 수목(樹木)의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 그 누구도 피할 길 없는 인간의 조건이 우리 앞에 장애물처럼 놓여 있다. 나무는 뼈다귀를 드러냄으로써 혹한의 세계를 견딘다지만, 건너갈 수 있다지만, 인간은 벌거벗으면 분열이 온다.

조르조 아감벤에 의하면 정치와의 관계, 이데올로기와의 관계에 의해 생명은 “고귀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보호받거나 대량으로 상할, 희생될 위기에 처한 것이 오늘날 인간의 “벌거벗은 생명"의 두 갈래 길이다. 나무도 예민하지만 인간도 예민하게 살아 있다. 하물며, 함부로 뿌리를 뽑을 수는 없는 일이다.

재개발의 명목으로 뉴타운건설, 신세계건설의 명목으로 도처에서 뿌리뽑힌 삶들이 벌거벗은 그대로 아파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조차도 하나의 생명체로 보았다. 생명의 가치를 신과 동격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롭게 건설되는 뉴타운의 벽을 타고 ‘지금 집이 없는 자들의’ 피가 흐르게 해서는 안 된다. 눈물이 흐르게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어디로부터 흘러왔는지를 기억한다면. 누구나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권현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