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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 한 켤레의 교훈

손범숙 기자   
입력 : 2002-02-28  | 수정 : 200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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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엄스님 행장기 '회색고무신' "스님이 알고 있는 거, 다 내한테 가르쳐 줄 수 있겠습니꺼?" "가르쳐 주지, 다 가르쳐 주고말고!" "참말입니꺼?" "그라모 나, 중 될랍니더." 묘엄 스님이 출가를 결심할 당시 성철 스님과 나눴던 대화 내용이다. 그때 나이 14세, 묘엄 스님은 일제 치하시절 정신대에 가지 않기 위해 찾아간 대승사에서 아버지인 청담 스님과 인생의 큰 스승인 성철 스님을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끝도 없는 불교의 진리와 지식을 배우기 위해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도, 꽃다운 나이에 생과부 신세가 되어야 하는 어머니의 애처로운 처지를 저버린 채 불제자의 길로 들어선 아버지 청담 스님, 그 때만해도 묘엄 스님은 이 세상에 없었다. 하지만 애절한 노모의 원을 들어주기 위한 하룻밤의 파계가 한국 비구니계를 이끌 큰 스승, 묘엄 스님을 이 세상에 나게 했다는 것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는 밥이나 짓고 빨래나 하고 욕질이나 하는 그런 여승은 안 될랍니더, 그러니 나를 꼭 훌륭한 법사중(法師僧)으로 만들어 주시이소." 청빈한 수행자의 삶을 살며 우리나라에 비구니계를 바로 세우고, 비구니들의 스승이 되기 위한 고된 수행의 길을 걸어 온 묘엄 스님, 평생토록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어 온 한 노비구니 스님의 행장기 '회색 고무신'은 스님의 딸로 태어나 한국 비구니계의 가장 큰 스승이 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삶이 솔직하고도 편안하게 담겨져 있다. 딸의 수행길을 묵묵히 지켜보며 훌륭한 비구니 강사가 되도록 도와준 무뚝뚝한 아버지 청담 스님, 친구의 딸에게 불교와 역사, 교양 등을 손수 가르쳐 주고 '묘엄'이라는 법명을 내려 준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은 스승 성철 스님, 어려운 경전 공부를 도와 주고 묘엄 스님이 비구니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스승의 길을 열어 준 경봉 스님과, 운허 스님까지….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일제 시대와 6.25 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어려움 속에서 우리 불교를 살리기 위해 혁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은 우리 시대의 큰 스승들을 만나게 되고, 그 가운데 한국불교와 불교정화운동, 불교 교단의 모습 등 한국불교사를 되짚어 보게 될 것이다. 묘엄 스님의 조카인 부산대 철학과 김용환 교수가 이모 스님과의 대담을 꼬박 녹취하여 '고승열전' 시리즈로 유명한 윤청광 선생에게 전해 다시 소설 형식으로 풀어 쓴 결과물이 '회색 고무신'이다. 낡은 걸망 하나, 기워 입은 옷 한 벌, 그리고 고무신 한 켤레가 가진 것의 전부였던 시절, 맑은 가난을 즐기는 묘엄 스님과 청빈한 옛 수행자들의 삶이 오히려 우리의 텅 빈 마음을 가득 채워 줄 것이다. 묘엄 스님 구술·윤청광 엮음 / 시공사 / 값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