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인과의 삼시보

밀교신문   
입력 : 201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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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지은 인으로써 현재 받는 과도 있고 현재 지은 인연으로써 현재 받는 과도 있고 현재 짓는 인연으로 미래 받는 과도 있다. 그러므로 인과법은 삼시보(三時報)로 받게 되니 진리각성(眞理覺醒) 한 자()라야 이를 능히 알게 되고 사견집착 끊어져서 해탈광명 나타난다. 모든 사람 정견(正見)으로 선악인과 깨달아서 허영으로 복() 구하는 마음 두지 말 것이요. 인을 짓지 아니하고 과 얻기를 바란다면 그보다 더 우치함이 어느 곳에 있을 건가. 자기 소원하는 바가 마음대로 이뤄짐은 육행으로 그 인연을 짓는데서 성취되니 이와 같은 참된 법을 능히 깨쳐 실천하여 대소사(大小事)의 원하는 바 뜻과 같이 이뤄진다.”(실행론 제3편 제12장 제3)

 

프로젝트 증후군

 

한 발짝도 내디디지를 못했다. 몸을 추스르고 간신히 용기를 내 한 발이라도 들었다가 내딛기를 할라치면 거대한 힘에 짓눌려 이내 주저앉혀지곤 했다. 반복을 되풀이하는 도돌이표를 짊어진 신세와 같았다. 움직일 때마다 뒤에서 누군가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아등바등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도저히 놓여날 수 없는 처지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끊을 수 없는, 지옥에서나 있을 법한 사슬 같은 것으로 단단하게 묶여 있거나, 거대한 어두운 그림자가 사사건건 제지하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절대 권력에 사로잡혀 있는 가련한 영어의 몸이라고 치부하며 자포자기 상태로 생각을 허물고 전신을 늘어뜨리는 것 이상은 의지작용 밖의 일로 짐작됐다.

 

선우는 마치 악몽에라도 시달리듯 하루 종일 먼 산만 바라보며 멀뚱멀뚱 시간을 갉아먹었다. 숨을 쉬며 삼시세끼 밥 먹고, 누운 자리거나 앉은 자세로 대소변을 쏟아내는 것 외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그것 밖에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가족들로서는 시시때때로 눈이라도 껌뻑거려주는 것만으로 생명은 이어가고 있다는 신호를 준다고 여겨 작은 위안으로 삼았다. 코에 귀를 들이밀고 숨소리를 들으려고 애를 쓰거나, 맥박을 짚어보느라 수선을 떨면서 선우를 성가시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나름의 안도였다.

 

선우는 한때 역사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던 선우가 자기 안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식물인간처럼 지내게 된 것은 업무로 인한 무게감과 스트레스가 작용했다는 것이 대다수의 생각이다. 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치는 것 외에 부수적으로 수행했던 프로젝트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대학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못했다.

선우가 한 순간 대학 강단을 떠나자 가장 안타까워했던 이는 미리였다. 같은 학과는 아니었지만 학문적으로 윈-윈 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서 여러 단계의 접점을 모색하는 프로젝트 동반자였다. 당시 대학에서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육성한다는 차원에서 소위 퓨전학문을 연구하고 개발하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능성이 가장 크고 모든 교직원들의 관심대상이었던 제1영역이 역사학-미래과학-심리학을 융합하는 것이었기에 미리는 선우나 지선과 자주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세 사람은 나이도 같고 취향도 비슷해 교내에서는 더없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척 하면서도 은근히 샘을 내는 부류들도 생겨나고 있었다. 그렇게 시샘하는 이들의 질투가 쏟아져서인지 선우가 떠난 뒤 시름시름하는 증상은 미리에게서도 엇비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미래과학자였던 미리가 보인 증상은 하루하루가 거저 빨리빨리 흘러가기만 바란다는 점이었다. 쏜살같이 흐른다는 세월은 도대체 어디 갔나 싶어 하며 그 세월을 좇아서 안달할 정도였다.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는 것을 깨닫고 지독하게도 끔찍하게 여긴 미리는 심지어 몸서리를 치기까지 했다. 방금 들었던 생각도 쉽게 내팽개쳤다. 과거에 얽매이거나 붙들려서 현재에 안주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래야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조금은 더 빨리 흘러가지 않을까 해서라는 말도 쉼 없이 해댔다. 오늘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미리에게는 내일 또 내일, 다음 또 그 다음만 필요했다.

 

미리에게 과거는 치워버려야 할 업 덩어리로 치부됐다. 아무리 아끼던 물건이라도 한번 내다버린 것일랑 다시는 생각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고 다짐할 때처럼 쓰레기더미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했다. 추억이니, 아름다운 유산이니 하는 말은 시쳇말로 개뿔(?)로 여겼다. 지나간, 흘러간 더딘 시간만큼이나 지금도,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내일, 다음, 미래에만 사로잡혀 있던 미리를 지켜보는 가족들과 주변인들로서는 말 그대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미리 부모들로서는 교수를 시킨 것 자체를 은연중 후회스러워하면서 대학을 원망하기도 했다.

 

선우와 미리의 동시다발적 이상행동을 누구보다 심각하게 지켜보고 인지하면서 퓨전학문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중단시켜야 한다고 대학에 호소한 이는 지선이다. 학교에서 거두어들일 막대한 이익이나 시너지효과도 사람의 안녕을 담보하지 못한 채 추진돼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지선의 주장이었다. 선우와 미리가 손을 쓸 겨를도 없이 당한 어두운 그림자는 이미 자기 앞에도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서는 더 이상 프로젝트를 진행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시나브로 찾아온 증상을 스스로도 감지했다. 자가진단으로 느껴진 증상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서서히 젖어든 것 같았다. 중독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하거나 표현하지 못할 느낌이었다. 어쩌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전부터 인연적으로 지녀왔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온 내재된 요인도 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평소 현실주의 심리학자라는 별칭을 들었던 것이 지나친 말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였다.

 

지선의 행동은 선우나 미리의 중간 입장을 취했다. 황금비율로 나눈다고 한들 이보다 더 정확하게 나룰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선은 과거도 그렇고, 미래도 그렇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지지 않고 딱 중간적인 입장에서 현실지상주의자처럼 행동했다. 생각도,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극도의 현재시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난 이야기나 어제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생각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음의 일을 말하거나, 다가올 시간을 기다리는 것 같은 마음은 아예 내려고도 하지 않을뿐더러 누군가가 나중에……라는 표현이라도 하면 짐짓 손사래를 치면서 눈을 꼭 감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선이 보인 이상행동 중 또 다른 것은 쉴 새도 없고,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수한 말을 끊임없이 뱉어낸다는 것이다. 화법은 당연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누가 교수 아니랄까봐 구사하는 서술은 지극히 논리적이었다. 그래서 쏟아내 놓는 말로만 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디를 봐서 이상증상을 보이는 사람으로 여길까 싶었다.

*

급기야 대학이 퓨전학문 연구개발 프로젝트 포기를 선언했다. 지선이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한다고 수차례 이야기 했을 때만 해도 꿈쩍도 않던 학교였다. 선우나 미리에 이어 지선까지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 맞닥뜨리자 더 이상은 진행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진작부터 접으려고 고심하고 있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과거는 과거대로 추억이 있고 뒷사람이 배울 유산이기에 아름답습니다. 미래는 설렘과 기대 속에서 맞이할 수 있는 신선함이 있고 희망이기에 이 또한 아름답습니다. 현재는 지금, 여기서, 이대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자 행복이기에 역시 아름답습니다. 대학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분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주시면 이처럼 상아탑의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는 물론 과거와 미래를 지향하는 중심을 잘 세워서 치우치지 않고 행복할 수 있기를 충심으로 바랍니다.”

궁색한 입장문이었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