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만다라

안경
해마다 추석이 다가오면 선산에 벌초하는 날을 잡고 그간 떨어져 살던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올해는 유달리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태풍까지 연이어 닥치는 바람에 우거진 숲이 뒤엉켜 산소 가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찔레덤불과 칡넝쿨이 엉켜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산등선을 어림잡아 산소를 찾아간다. 벌초도 하기 전에 후줄근하게 땀이 흐르고 늦여름인지 초가을인지도 모를 날씨에 렌즈에 땀이 흘러내려 안경을 벗었다 쓰기를 반복한다. 앞산 뒷산 할 것 없이 굉음을 지르는 예취기 소리에 고요하던 산들이 들썩거린다. 가끔 산비둘기 울음소리만 고즈넉하게 들려올 뿐이다. 베어진 풀을 끌어 모아 정리를 하고 깔끔하게 단장된 산소를 둘러보니 사방에서 향긋한 풀 냄새가 밀려든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땀이 흘러내려 닦고 쓰기를 반복하던 안경을 아예 벗어 곁에 두었다. 얼룩진 안경으로는 선명하지 않던 구름이 푸르디푸른 하늘에 가을을 수놓고 있었다. 솔바람 한줌 스쳐지나가고 이름 모를 새소리에 정신...
2010-09-13 16:14:04
마지막 인사 "미안하다. 사랑한다. 잘하겠다."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O형 간 기증자를 구합니다."지난 7월 26일 한 언론에 보도된 기사 리드다. 인용문만 놓고 보면 흔히 있을 수 있는 호소로 특별할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행을 건너뛰면 사정이 달라진다. 화자는 대담하게도 차들이 씽씽 달리는 잠실대교 한가운데 올라 이 같은 내용의 플래카드를 걸고 1200여 장의 유인물을 뿌리는 화끈한 홍보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흉기까지 든 채….사연은 이렇다. 주인공 이모씨의 어머니는 전격성(증상이 급격히 악화되는) B형 간염이라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7개월 동안 혈액종양과 싸우느라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이씨는 기증자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으나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소동이라도 벌여 언론에 보도되면 은인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심정으로 다리에 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 시간 만에 출동한 경찰에 붙잡혀 입건되고 말았다.'흉기 소동'이라는 건조한 제목이 뽑혔던 사건은 그렇게...
2010-08-30 10:56:06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
말! 말! 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이지만 부드럽고 온화한 말 한마디가 나와 남을 편안하게 한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말은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인간관계의 기본이 된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 된 근본도 말 때문이리라. 만약 말이 없다면 메마른 대지처럼 무미건조하고 쓸쓸할 것이다. 또한 인간에게 언어가 없다면 이 땅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가 될 것이다. 우리는 말속에 깊은 생각을 담는다. ‘사랑과 감사의 말!, 위로와 격려의 말!, 신념과 용기의 말!, 참회와 지혜의 말!…’ 부드럽고 온화한 말은 삶 속에 지친 마음 속까지 봄눈 녹듯 풀어준다. 성내는 음성으로 쏘아붙이는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얼어붙게 한다. 우러나오는 참회와 밝은 지혜의 말은 감동과 광명을 준다. 이처럼 말속에는 뜻이 있고 얼이 있고 생각이 있고 사상과 정신이 들어있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소중히 여겨 갈고 다듬어 키우고 살려가야 한다...
2010-08-12 17:42:34
휴가
찜통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가운데 직장인들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칠월 말부터 팔월 초까지가 가장 더운 시기라서 이 기간에 휴가를 정하는 기업들이 많다. 그러나 회사마다 최소한의 직원들이 남아서 휴가 후 업무에 복귀할 동료들을 위하여 기기를 점검하거나 사무실 정리에 비지땀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다.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공단이 들어선 곳이라 휴가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외지로 휴가를 떠나간다. 그래서 휴가기간 동안 도심은 잠시 동공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북적대던 도로가 한산해지고 거리엔 눈에 띨 정도로 오가는 사람들이 적어진다.상가도 장사를 포기하고 문을 닫거나 문을 열어도 손님을 기대하지 않는다. 여름휴가철이면 나타나는 현상이기에 상인들도 그러려니 하며 자포자기하고 만다. 휴가(休暇)는 한자풀이 대로 쉴 틈이라는 뜻이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노동에 시달린 몸과 마음을 잠시 쉬게 하자는 의미에서 휴가를 만들었겠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못하다.썰물처럼 도시를 빠져나간 사람들은 몇 시간...
2010-08-07 22:11:31
자식 농사가 ‘제일 큰 농사’라는데
옛날 어른들이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두 가지가 있었다. 논에 물 대는 것과 자식 입으로 밥 들어가는 장면이 그것이다. 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 농사 잘 되고 자식 굶기지 않는 것 이상의 절대적 가치는 없었던 것이다. 자식 키우는 일은 자연스레 ‘자식 농사’가 되어 ‘제일 큰 농사’ 대접을 받았다. 인간의 손길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수작업인 농사 중에서도 제일 힘들고 고귀한…. 그런데 후대 어느 때부터 ‘큰 농사’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법칙을 잊어버렸다. 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위대한 진리도 망각했다. 사랑과 정성을 쏟는 과정보다 수확량이라는 결과에 급급해 땅을 닦달했다. 성장에 좋다는 이유만으로 체질에 맞지 않는 비료를 무차별 투하하고 못생기고 맛이 없다며 작물의 유전자를 바꾸는 무서운 실험도 했다. 며칠 전 트위터를 뜨겁게 달군 자살 사건의 주인공이 ‘잘못된 농법’의 대표적 피해자다. 한 외고생이 베란다에서...
2010-07-14 18:57:11
뜨거운 여름 그리고 열정!
일 년 중 낮이 제일 긴 하지가 지나자마자 본격적인 여름을 알리는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지금 지구촌은 미지의 대륙 아프리카에서 처음 개최된 '월드컵' 열기로 한층 더 달구어진 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전국을 붉은 물결로 물들이며 신명을 풀고 있는 우리나라도 역사상 처음으로 원정 16강 진출을 이루어 온 국민은 환호와 기쁨 속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흥분과 감격의 박수갈채를 아낌없이 선수들에게 보냈다. 정정당당히 싸워 이긴 승리는 피와 눈물과 땀으로 이루어낸 감동의 드라마가 되어 젊음의 여름을 더 뜨겁게 한다.뜨겁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뜨거움은 정열이요, 감격이요, 환희이며 도취이고 일심전념이다. 해가 뜨겁기 때문에 만물을 생성하고 곡식이 무르익고 과일이 성숙해 진다. 사랑의 자비행은 뜨겁기 때문에 우리를 감동케 한다. 피가 뜨겁기 때문에 벅찬 충만감을 맛볼 수 있다. 빗속에서 밤을 지새우며 한마음이 된 그 열정! 축구를 통해 사람들은 종교나 이데...
2010-06-29 15:47:12
월드컵 신드롬
2010년 남아공월드컵이 시작되었고 지난 토요일은 한국의 첫 경기가 있었다. 유럽의 강호 그리스를 상대로 호쾌한 경기를 치른 대표팀은 기대 이상의 실력과 성적을 보여줬다.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부터 시작된 붉은 악마들의 단체응원전이 이제는 스포츠분야에 있어서 하나의 연례행사처럼 되었다. 좀처럼 단결된 모습을 보기 힘든 요즘의 사회 분위기로 보아, 월드컵 응원을 통한 단결된 모습은 스포츠가 얼마나 인간 본성을 들끓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붉은 악마의 유니폼으로 인해 서울시청광장에 붉은 물결이 휩쓸고 간 한일월드컵 후로 우리 사회에서 언제부턴가 레드콤플렉스가 사라졌다. 정열적인 응원을 펼치는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서 앞으로 전개될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는 발전되고 합리적이며 민주주의가 견고히 다져진 사회가 되리란 확신도 가져본다. 울긋불긋 원색으로 치장한 응원도구며 분장을 보면서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에 슬며시 미소도 지어본다. 하지만 우리는 잊고 있는 것이 ...
2010-06-14 16:39:08
국민을 행복하게 하라, 사랑 받으려면
정치란 무엇인가. 네이버 백과사전은 '통치와 지배, 이에 대한 복종 협력 저항 등의 사회적 활동의 총칭'으로 간단히 규정하고 있다. 다스림과 다스림을 받는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행위와 움직임이 곧 정치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좋은 정치, 바람직한 정치'는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쉽게 말하자면 '다수인 국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통치기술 혹은 철학' 정도가 될 것이다.지금 국민 앞에 '좋은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대부분 출신 학교와 사회 경력이 화려하기 그지없는 전문가들이지만 공약(公約)이 지나쳐서 공약(空約)이 될 소지가 커 보인다. 어떤 이는 경쟁자의 약점을 물고늘어짐으로써 정치인이 아닌 정치꾼 자질(?)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주장과 주장이 침을 튀기고 공세와 공세가 피를 튀긴다. 모두 '일단 붙고 보자'는 생각인 듯하다.그렇기에 더욱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피오렐로 라과디아....
2010-06-01 14:19:34
천지사방 모두 꽃
천지사방 꽃불 번지는 봄, 옥연사를 찾았다. 옥연사는 조선전기 시인 정치가 사상가로 영의정을 지낸 소재 노수신 선생의 사묘재실이다. 이곳 유장각에 보관되던 유품들은 종가의 기탁으로 거처를 상주박물관으로 옮겼다. 궤에 갇혀 숨 막혔을 고서들을 비롯해 목판 등 많은 유품이 비로소 바람을 쐬고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소재선생은 20여 년 동안 유배생활의 고통과 비애를 학문으로 승화시켜 '숙흥야매잠해', '인심도심변', '집중설' 등을 남겼다. 당시 성리학자 일반은 인욕(人欲)을 불선(不善)으로 보고 금욕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는 인욕을 긍정하였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것을 자신의 심학(心學)으로 이루어냈으니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명학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500년 동안 정주학을 으뜸으로 하는 학문분위기 속에서도, 이단으로 배척되던 육왕학, 도교 불교의 사상까지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호방한 학문태도를 보였다.그의 시 '별사내옹(別四耐...
2010-04-29 11:18:05
분홍의 말씀
고의의, 혹은 미필적 고의의, 혹은 우발적인 사건 사고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우울한 요즘 뉴스를 피해 동네 뒷산을 올랐다. 불과 며칠 사이에 산은 마법에 빠져 있었다. 사랑에 빠져 있었다. 사월 초순의 산은 온통 연두로 분홍으로 노랑으로 물들어 있었다. 진달래는 제 마음인 듯 신의 섭리인 듯 산을 온통 분홍으로 감싸안고 있었다. 세상의 악의와 미필적 고의와 상관없이 분명히 절대적 아름다움은 가까이 저만치 피어 있었다. 다문다문 서 있는 연노랑의 산수유나무며 진개나리 등 윤곽이 뚜렷한 아름다운 얼굴들이 세상을 향해 서 있었다. 세상과 마주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살아가면서 마음이 어두운 순간 새나 고양이나 나무나 꽃이나 살아 있는 다른 존재들이 얼마나 내게 빛이 되어 주었던가. 무엇보다도 사람에게서 얼마나 위로를 받았던가. 새삼스럽게 삼라만상이 귀하게 느껴졌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얼음이 살 속에 박혀 차갑게 서걱거리던 땅에 꽃 천지라니! 조그맣게 실눈을...
2010-04-15 17:16:49
즐거운 불편
“언니, 그게 참말이가?” 오랜만에 만난 후배는 정색을 했다. 나에게 자가용이 없다는 게 통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러더니 차가 있어야 가고 싶은 곳을 맘대로 갈 수 있다며 하루라도 빨리 차를 마련하란다. 사실 나는 운전면허시험을 본 적도 없다. 후배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은 내가 당연히 운전을 할 줄 안다고 여긴다. 그래서 운전면허증조차 없다는 사실을 전혀 믿지 않는다. 나는 신용카드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입하고 나서 다음에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돈은 속이 쓰리다. 또 당장 현금도 없으면서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통장관리를 해야 하는 등등의 뒷감당에 자신도 없다. 현대의 대량소비사회에 살면서 “안 쓰면 되지”하는 생각은 힘이 없다. 온갖 매체를 통해 부디 소비해주기를 간절히 요청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주체적이지 못한 충동과 무절제한 소비를 하게 된다. 그래서 신용카드를 없애버린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손 전화를 없앤 적이 있다. 한시도 숨 돌릴 ...
2010-03-30 15:51:17
나눔, 세상을 살리는 납설수(臘雪水)
“엄매와 나는 앙궁 우에 떡돌 우에 곱새담 우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냅일눈 약눈을 받는다”(백석 '古夜' 부분) 예전에는 동지로부터 셋째 미일(未日)인 납일(臘日)에 내리는 눈을 특별하게 여겼다. 그 눈을 정성껏 받아 녹인 납설수(臘雪水)로 환약을 빚었다. 의서(醫書)에 “납설수는 염병과 모든 병을 다스린다”고 한 데서 생긴 풍속이다. 지난겨울에는 눈이 엄청 내렸다. 폭설과 한파로 인한 사건사고와 피해도 잇따랐다. 자연기후변화는 또 하나의 전쟁이다. 황사, 가뭄, 태풍, 장마, 지진, 폭설과 강추위 등은 분명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다. 지난 1월 12일 일어난 아이티 지진만 해도 그렇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강진으로 아이티는 폐허더미에서 신음하고 있다. 내전과 쿠데타, 자연재해로 점철된 역사를 가진 가난한 나라 아이티의 이번 지진은 더욱 견디기 힘든 상처이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장은 참혹하기만 하다. ...
2010-02-11 17:10:23
당신의 생의 조도(照度)는?
생이 가장 환하게 빛났을 때가 언제였는가를 돌이켜보면 나의 경우는 이십대 무렵이다. 전망이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희망이 시퍼렇게 살아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생의 조도가 최대치에 이르러야할 시기가 대부분의 경우 이십대일 거라는 데에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그것은 열정을 쏟을 일에 앞뒤 재지 않는 몰입, 새로운 자유, 새로운 영향력에 대한 고민 등이 이십 대를 추동해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성의 가치관에 주저 없이 편승해 물질적 풍요를 최고 가치로 여기고 명품을 무슨 슬로건처럼 내걸고, 영혼의 혁신보다는 성형을 통한 안면의 혁신에 주력하고 그런 세태라면, 그런 세대라면 빛나는 시절이라고 불릴 수 없는 일이다. 새벽에 음악프로를 보고 있었다. 김장훈씨의 노래 ‘사노라면'을 가수와 함께 부르는 객석의 젊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어떤 간절함이 느껴졌다. 쩨쩨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 펴라! 그들의 고뇌가 영상을 타고 전달되었다. 생의 조도가 높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
2010-01-29 11:04:45
천태산 은행나무
늦가을이다. 노오란 이파리를 다 떨어뜨리며 묵상의 시간으로 건너가는 은행나무는 처연하고 아름답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용문사 은행나무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영동 천태산 은행나무도 천 년의 수령을 자랑한다. 천태산 은행나무는 천 년의 세월동안 생명을 품고 있는 자연 그대로 천태산의 부처로 불린다. 천태산 은행나무가 슬피 울면 그것은 곧 국란이나 국상 등 환란과 재난을 예고한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양문규 시인은 "그 울음은 희망을 노래하는 전령, 미혹의 세계에서 각성의 세계로 오는 생명의 소리(키가 큰 만큼 생이 깊은 저 은행나무)"라고 한다.최근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모임'이 결성되어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詩祭)가 열렸다. 누대에 걸쳐 좌절과 절망을 제 울음으로 감싸고 있는 천태산 은행나무의 큰 품에 안긴 것이다. 이날 "혼탁한 시대에 천태산 은행나무의 올곧은 마음과 따뜻한 그늘의 정신을 배우고, 아름다운 삶을 가꾸어가고...
2009-11-16 11:15:54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
해 그림자의 허리가 짧아지고 있다. 어느새 나무들이 여름날의 수다한 수사(修辭)같은 잎사귀들을 하나 둘 덜어내고 있다. 기나긴 겨울을 나기 위해 몸을 가볍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맘때면 꼭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삶의 실체가 안개 속에 숨어있는 문학소녀였을 때는 이 구절이 조금은 달콤한, 막연한 쓰라림으로 다가왔지만 새삼 가슴이 서늘해지는 문장이다. 노숙자거나 이민자거나 전세, 월세를 내기 어려운 사람 등 존재기반이 허약한 사람이라면,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이라면 가슴이 서늘하다 못해 먹먹해지는 문장일 것이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여전히 존재의 집을 짓고 허무는데 열정을 쏟을 것이고 문학의 말미에서 말미잘처럼 수사에 기대어 살 것이고 수사를 밀고 가느라 애쓸 것이다. 문제는 실체다. 수목(樹木)의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 그 누구도 피할 길 없는 인간의 조건이 우리 앞에 장애물처럼 놓여 있다. ...
2009-10-28 11: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