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저는, 제가 선택해서가 아니라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심인당을 드나들었습니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린 나이부터 심인당 마룻바닥에 앉아 염송하던 그 시간들은, ‘신심’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성일 아침마다 꼭 보고 싶던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 시간이 얼마나 기다려졌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머님은 단호하셨습니다. “먼저 불공이다.” 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심인당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때로는 무거웠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제 인생 신행의 씨앗이었습니다. 어머님의 엄한 사랑과 간절한 서원이 저도 모르게 제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스스로 신행에 마음을 내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시골에서 대구로 전학을 온 뒤 보원심인당에 다니면서 였습니다. 그때부터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제 마음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새해대서원불공 때는 세 시간 정진도 마다하지 않았고, 자성학교에서부터 학생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부처님오신날 행사, 심인당의 크고 작은 법회와 행사마다 기쁨으로 손을 보탰습니다. 신행은 더 이상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제 삶을 지탱해 주는 ‘숨결’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제 인생에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하던 언니가 대학입시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은 학력고사로 학교와 학과를 미리 정해 시험을 보던 때였습니다. 언니는 안전한 합격을 위해 성적보다 낮춰 지원했고, 가족 모두는 언니의 진학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올렸습니다. 어머님도, 언니도, 그리고 저도 한마음으로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우리의 바람과 달랐습니다.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진학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던 시기였고,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응? 이게 뭐지? 성적도 충분했고, 정성도 다했고, 진심으로 불공을 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어린 제게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공부를 잘하던 언니의 학업을 위해 대구로 이사까지 왔던 터라 그 충격은 더 컸습니다. 무엇보다, 많이 힘들어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제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두 살 터울의 여동생 둘과 남동생까지 동생이 셋이던 언니는 가정 형편상 재수는 꿈도 꾸지 못하고 전문대학에 진학해야 했습니다. 그런 언니를 보며 저는 처음으로 ‘불공’과 ‘결과’ 사이에서 갈등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공은 결과를 바꾸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내 마음을 밝히는 수행이라는 것을. 그때의 경험은 제 신심을 꺾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그 과정을 통해 가족은 더 단단해졌고, 언니는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또 다른 자신만의 길을 열어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불공할 수 있는 마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언니의 일을 겪으며 제 마음속에는 한 가지 서원이 또렷이 자리 잡았습니다. “나는 꼭 대학에 진학해서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려야겠다.” 시간이 흘러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님과 저는 큰 불공을 정했습니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밤이 늦었지만,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심인당에 들러 염송을 하기로 스스로와 약속했습니다. ‘대입학력고사를 치르는 그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불공하겠다.’ 그 약속은 저 자신과의 서원이었고, 부처님과의 약속이었습니다. 때로는 불이 꺼진 마당과 고요한 심인당이 무서울 때도 있었습니다. 인기척 하나 없는 그 공간에 홀로 앉아 염송을 시작하면, 어린 제 마음에 두려움이 스며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한 불공을 궐하지 않고, 12월, 학력고사를 치르는 날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심인당에 들러 염송을 이어갔습니다. 물론 어머님도, 당시 제가 다니는 심인당 종사님께서도 함께 불공을 해주셨고 그 정성과 격려는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저의 뒤에는 언제나 어머님과 종사님의 더 깊은 서원이 있었습니다. 그해, 저는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합격했고 저는 지금도 제 곁에서 한결같이 염송하시던 어머님과 종사님의 은혜를 잊지 못합니다.
고3 시절의 저는 두려움도 많았고, 부담도 컸습니다. 대학에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조차도 법석 위에 올려놓고 염송할 수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스트레스가 있지만, 제게는 심인당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저는 그 시절, 공부에 지친 몸으로도 불공을 이어가며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나면, 그 다음은 부처님께 맡기는 것.” 그 믿음이 있었기에 두려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제 신심을 한층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돌아보면, 제 학창 시절의 밤들은 단지 입시를 위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심을 다지는 수행의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그 고3의 밤을 떠올립니다. 형광등 아래에서 문제를 풀던 소녀가, 심인당에서 간절함으로 소리 내어 염송하던 그 마음을요. 그 마음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습니다.
진각종의 가르침은 제게 늘 말해주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이 마음으로 불공 정진하라.” 어린 시절 억지로 앉았던 불공 자리, 세 시간 불공 정진으로 다져진 인내, 언니의 입시 실패를 통해 배운 무상과 인과의 깊은 뜻…. 그 모든 시간이 모여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돌아보면, 진각종과의 인연은 선택이 아니라 ‘서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에 진학한 후, 어머님은 또 하나의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이제 네 짝을 위해 3년 불공을 하자.” 3년 불공은 곧 3년 동안 자성일을 지키는 수행이었습니다. 대학 생활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싶었던 제게 그 제안은 솔직히 반갑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의 깊은 신심과, 그 신심 덕에 제가 여기까지 왔음을 알았기에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시 3년의 불공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불공의 인연일까요? 진각종을 전혀 모르던 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준비하며 49일 불공을 시작으로, 결혼 24년이 된 지금까지도 각자님은 진각종의 교리를 좋아하고, 저와 함께 불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그 3년 불공이 오늘의 이 인연을 준비해 준 것은 아닐까 하고요. 진각종과의 인연은 이렇게 제 학업과 가정, 그리고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불공의 공덕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경험했기에, 그 힘을 알기에, 자연스럽게 전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제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마다 늘 불공이 있었습니다. 두려운 밤, 아무도 없는 심인당에서의 염송. 대입학력고사를 치르기 위해 시험장으로 향하던 새벽길. 원서를 쓰기 전 법문을 기다리던 순간. 그리고 인연을 준비하던 3년의 시간. 그 모든 자리마다 어머님이 계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히 고백합니다. 저의 가장 큰 스승님은,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엄격하게 손을 잡아 이끌어 주셨던 어린 시절, 결과보다 정성을 가르쳐 주셨던 입시의 시간, 미래의 짝을 위해 먼저 서원하셨던 그 깊은 마음까지….
어머님의 신심은 제 삶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염송할 때마다 어머님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지금의 불공이 힘겹게 느껴져도, 그 고행의 정성은 반드시 삶의 어느 자리에서 빛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올린 정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때가 되면 가장 이로운 형태로 꽃피운다는 것을. 저의 큰 스승님, 저의 어머니. 그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며, 저 또한 누군가의 신심을 일깨우는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발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