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것만큼 큰일이 또 있을까. 생존과 직결된 것이니 세상에서 이보다 더 중한 일은 없다. 사람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먹고 있는 개도 건드리지 않는다. 생명 있는 것들은 생존을 위한 행위를 본능으로 삼는다. 그래서 먹는 행위는 거룩하다.
거룩한 만큼 무거운 일이기도 하다. 먹기 위해서 다툰다. 먹기 위해서 고된 노동을 하여야 하며, 어느 때는 굽신거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먹을 것을 차지하려고 집단 간 전쟁마저 불사했던 것이 인류 역사의 밑그림이다. 오늘날도 그렇다. 다만 무력보다는, 전쟁의 참상으로부터 얻은 지혜인 경쟁과 협력이라는 방법을 앞세우고 있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에는 행위 규율이 있다. 불교에서 모든 행위는 깨달음을 향해 있다. 먹는 것에서도 이런 지향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권장과 금기를 설정해놓았다. 오신채와 사자와 호랑이 등의 사나운 짐승, 코끼리와 같은 왕을 상징하는 동물, 사람과 친연성이 높은 개 등을 먹지 말아야 할 음식 재료는 금기로 삼았다. 배고프지 않거나 때아닌 때에 먹는 것을 꺼린다.
공양 게송(오관게)은 불교의 음식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보기이다. “이 음식이 온 곳과 그 공덕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보니/내 덕행으로는 떳떳하게 공양받기가 부끄러워라/마음을 다스려 허물을 벗어나는 것에는 탐욕 등이 으뜸이니/몸이 마르는 것을 막는 약으로 여겨/깨달음을 이루기 위하여 이 음식을 받습니다.” 음식을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에게 회향하기 위해 이 공양을 받는다는 것이다. 음식은 감각을 일깨워 맛과 향과 모양에 이끌리게 되는데, 이 게송은 감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수행자에게 주는 경책이다.
위의 공양 게송은 대중들에게는 자칫 엄숙주의로 여겨질 수 있다. 먹는 즐거움을 제어한다는 점에서 무겁게 다가오는데, 여기에 빠지지 않으려면 첫째 구절에 방점을 찍어도 좋다. 음식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과정과 그 공덕을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환경연대 전 상임대표 수경 스님의 공양송은 여기에 주목했다. “이 밥은/대지의 숨결과 강물의 핏줄/태양의 자비와 바람의 손길로 빚은/모든 옛 부처님의 선물입니다./이 밥을 통해서 나는/모든 땅과 물은 나의 옛 몸이고/모든 불과 바람은 나의 본체임을 알겠습니다./이 밥으로써 우주와 한 몸이 됩니다./그리하여 공양입니다./온 몸 온 마음으로/ 온 생명을 섬기겠습니다.”
먹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행위이므로 즐거운 일이고, 밥 한 그릇에 담긴 온 우주의 생명 활동을 내 몸에 넣어주는 일이 즐거운 일이고, 온 생명을 섬기겠다는 다짐을 하는 일이니 이 또한 즐거운 일이다. 먹는 일의 즐거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교류하는 즐거움이다. 함께 먹는 사람과 삶을 나누고 보듬게 된다. 음식 재료와도 친화성이 생긴다.
음식을 먹는 일은 또한 세상을 더 좋게 만들어가는 과정에 참여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잘 아다시피 육식은 생산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물과 사료작물을 소비한다. 또 멀리서 생산된 음식 재료는 운반하는 중에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지구는 푸르러지거나 황폐해진다. 불교는 채식, 소식, 생태식을 권한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빛나는 가르침이다.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