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결집이 무엇인가 ?

밀교신문   
입력 : 20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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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우는 것보다 이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다

 

가섭존자가 부처님 열반 100일 만에 필발라굴에서 결집(saṃgīti)했다. 결집 목적은 첫째 부처님 가르침이 잘못 전해질 것을 염려함이오, 둘째 힌두사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결집장소에는 상수제자 1,250명 중 500명만 동참하고, 750여 명은 불참했다. 그러나 제1결집으로 불법이 자리하면서 더욱 발전했다. 그 후 100년 뒤 장로 700명이 모인 제2결집과 불열반 200년 뒤 비구 1,000명이 모인 제3결집과 불열반 600년 뒤 비구 500명이 모인 제4결집이 있었다. 이것 결집 역시 뒤에 많은 종파가 파생하면서 불교가 더욱 흥왕했다.

 

3결집의 외호자인 아소카왕(B.C.268-232재위)108곳에 불사리탑을 건립하면서 5국에 전도승을 파견했다. 아들 마힌다, 딸 상가밋타를 출가<()>시켜 불사리<()>와 보리수<()>6개월 차로 집사자국에 전래했다. 당시 데와남삐야띳사왕(B.C.247~207)은 사원을 건립해 불교<상좌부>를 국교로 발전시켰다. B.C.2세기 개혁적인 대중부가 일어나면서 밀교가 태동했다. 그 후 타밀인의 침략으로 왓다가마니 아브하야왕(B.C.43~29)의 왕권이 무너지고, 가뭄과 기근이 덮치는 가운데 힌두교의 반란까지 일어나 사원은 파괴되고 승려는 죽임을 당하는 법난을 당하였다. 승려는 환속하기도 하고, 일부 승려는 남인도 나가르주나로 피신하여 집사자국의 승원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몇몇 승려들은 마탈레 알루위하라 석굴에 숨어 경전을 암송하면서 목숨을 연장했다.

 

불교의 미래를 위하여 암송하던 스님은 굶주림으로 죽고 겨우 1명만 살아남았다. 왓다가마니 아브하야왕이 다시 집권하면서 석굴에서 암송하던 스님을 중심으로 숨어지내던 500여 명의 승려와 함께 대승과 밀교경을 패다라수에 결집했다. 이것이 팔리장경(Pāli-bhāsā)의 모체다.

 

이후 300여 년 흥왕하던 불교가 정통성을 주장하는 상좌부가 왕권의 힘을 빌려 대중부 및 밀교승을 죽이고 경전을 불태우는 갱승분경(坑僧焚經) 사건이 일어났다. 일부 스님은 경전을 배에 싣고 나가르주나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대승경과 밀교경을 결집하기도 했다.

 

이것이 용수보살의 용궁과 남철축 철탑에 매장된 <화엄경><금강정경>의 전래설 성립이다. 그 후 집사자국은 5세기 마하나마왕(410~432) 때 최고 학승으로 추앙받던 붓다고사<불음(佛音)>는 상좌부 교의를 중심으로 <청정도론>을 저술하면서 오로지 성도지의 보리수와 부처님 진신사리에만 귀명하고 여타는 금하는 법을 강조했다. 이것이 현재 스리랑카의 불교 신앙의 모습이다.

 

나란다 대학과 비크라마쉴라 대학을 중심으로 대승불교와 밀교가 흥왕하던 인도불교는 13세기 이슬람 침략으로 파괴되어 유적만 남았다. 그러나 힌두사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아무리 뛰어난 사상이 일어나도 언젠가는 보이지 않는 힌두사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인도 민족성이다. 보이는 법은 반드시 변하는 것이라, 변함을 다스리는 것이 결집이다. 부처님 법도 본래는 보이지 않는 법이지만, 중생 근기에 응하는 언어와 문자로 됨 법은 변하는 법이므로 결집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창종조나 개종조가 계실 때는 결집이 필요 없다. 성인의 말씀 자체가 근본법이기 때문이다. 진각종도 마찬가지이다. 이 땅에서 사라진 밀교를 중흥하기 위해 참회로 교화문을 개창했다. 교화 초기에 현교지마(顯敎智魔)의 준동, 진언종 분종, 내부의 법난을 겪으면서 창종 11년이 되어 비로자나불을 교주 본존, 육자진언을 수행 본존으로 하면서 금강계만다라 37존과 융합 회통하는 <자기관념도>(自己觀念圖)의 수행도를 작성했다. 14년에는 지금까지 전법한 법을 실행론으로 정립하여 법불교’, ‘응화방편문을 출간하면서 밀교 개창을 완성했다.

 

세연(世緣)이 다함을 아신 진각성존께서 열반 후 일어날 법을 생각해 이후 30년간 한 글자도 바꾸지 말라.”는 밀교 법통승수(法統承授)의 유법을 남겼다. 30년이란 당부의 말씀은 결집의 시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바꾸지 말라는 가르침만을 생각하고 결집을 생각하지 않은 가운데 준제파동의 분종과 잦은 내분이 일어나면서 진각 밀교는 승화시기를 놓쳤다. 그 후 열반 30년이 지난 뒤, 결집(?) 불사를 했다.

 

진각종의 결집은 창종조와 개종조의 가르침을 확고하게 세우는 불사이다. 불법(佛法)의 결집을 보면, 승단이 모여 남긴 말씀을 암송하면서 동참자 전원이 여시여시(如是如是)” 또는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말씀 그대로를 인증(印證)하는 불사이다. 만일 말씀을 바꾸거나 변경하거나 첨부할 경우는 경율론의 본 제명(題名)을 그대로 하면서 근본과 차별을 별도로 표해야 한다.

 

예를 들면 <대승기신론>에 현토와 해석을 첨부하면 현토역해대승기신론(懸吐譯解大乘起信論), 소를 첨부하면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소초기를 첨부하면 대승기신론소기회본(大乘起信論疎記會本)으로 명한다. 만일 연구한 것을 첨부하고도 <대승기신론>이란 제명(題名)을 사용한다면, 이것은 저작을 향한 불경(不敬)의 허물이 된다. 근본법에 첨가한 차별법은 차별적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창종조나 개종조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팔만장경 경마다 왜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 하였겠는가? 근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정법을 이어간다는 뜻도 있지만, 근본을 바꾸지 않겠다는 뜻도 함께 들어있다. 용수보살은 시대에 맞도록 팔불중도론(八不中道論)을 결집하므로 8종의 전승자가 되었으며, 중국에 전해진 달마 선법은 혜능 스님이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태우는 심인법 결집으로 57(五家七宗)의 선종이 흥왕했다. 진각밀교도 진각성존 실행론의 결집이 올바르게 이루어질 때 흥왕하게 될 것이다

 

진각종 원로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