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하나둘 회사를 떠났다. 자의든 타의든, 결혼, 육아, 건강, 삶의 전환점 앞에서 ‘회사’는 언제나 유연하지 못했다.
직장이라는 울타리는 생각보다 단단했고, 동시에 너무 딱딱했다. 한때는 일하는 시간이 곧 나를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고, 주말도 반납했다. 일이라는 세계가 주는 성취감과 긴장, 그 안의 압박조차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일’이라는 무대가 내 인생의 중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인생의 다음 장으로 넘어가며, 시간에 대한 감각이 또렷해진다. 내 하루가 어디에 쓰이는지 돌아보게 된다.
일에 몰두하는 만큼 가정에는 온전히 닿지 못하는 아쉬움. 그 균형을 찾기 위한 노력이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우리가 어릴 적 받았던 ‘직업 교육’은 단편적이었다. 삶의 방식이나 시간의 주도권 같은 본질적인 질문은 뒷전이었다.
점수에 맞춘 진학과 안정적인 직업을 쫓느라 정작 그 일이 내 삶에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달라질지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예전엔 ‘일을 계속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어떤 삶을 원하는가’ 더 본질적인 질문으로 바뀌었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보다,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직업을 꿈꾸는 이들이 늘고 있다.
직업이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을 넘어, 인생의 가치와 시간, 관계의 방식까지 맞닿아 있다는 걸 알아가고 있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할지, 지나온 시간들을 바탕으로 옆으로 뻗어가야 할지 하루하루 흔들리는 마음속에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여전히 헤매는 사람들,
잠시 멈춰선 채 가만히 주저앉은 사람들, 사실 나도 그렇다. 직업이 있다고 해서 덜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길 위에서 고민 중이다. 무언가를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혹은 이루는 중이든—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 그게 시간의 힘이다. 시간은 경험을 주고, 경험은 우리를 만든다.
김원각 시인의 《달팽이의 생각》에서 달팽이가 말했다. “다 같이 출발했는데 우리 둘밖에 안 보여.”
뒤에 가던 달팽이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걱정 마, 그것들 모두 지구 안에 있을 거야.”
어디서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당장 눈에 띄지 않아도 괜찮다. 살아 만 있다면, 시간은 결국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다 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지구 안’에 있으니까. 아무것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살아 있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
양유진/글로벌 서비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