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교구에서 5도 파견 불사 심인당 탐방으로 전주 항수심인당을 방문한다고 연락이 왔다. 부산에서 이 먼 전주까지 온다니 고마운 마음에 오시는 분들을 위하여 뭔가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었다. 좀 마음에 드는 선물은 가격이 부담되었다. 그래서 정사님이 고민하다가 감산 대사가 풀이하신 ‘노자도덕경’ 내용 중에서 ‘휴심’(休心)이란 글자를 한글서예로 써서 나눠주면 어떻겠냐고 하였다. 사절지 크기에 써진 휴심 글자를 보고 있으니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나의 예술작품이기도 하지만 뭔가 마음을 모아주는 힘이 있었다.
내가 좋다고 하니 정사님이 종이도 사고 새로 붓도 준비하고 한글 낙관도 만들러 가자고 한다. 길을 나서며 나도 모르게 그냥 신이 났다. 좋은 방편이 하나 생겨서 그런 것도 같다. 그리고 선물을 주는 입장에서는 받는 분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즐겁고, 받는 분들은 주는 사람의 정성을 받으니 좋은 것 같다. 아무튼 낙관을 정사님이 직접 디자인해서 주문하였다.
필방에 들러 붓글씨를 쓸 종이를 사 왔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휴심을 생각해 본다. 감산 대사는 ‘휴심’이 단순히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상태가 아니라 탐진치를 버리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마음 상태를 말한다고 하였다. 또 도덕경의 사상과 가르침을 바탕으로 마음을 쉬게 하고 내면의 평화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도덕경의 핵심인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소사과욕(少私寡慾)’의 사상을 품고 있다고 한다.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고 다시 휴심을 생각해 본다. 이 두 글자가 왜 이렇게 가슴의 와 닿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낮과 밤 없이 일하는 요즘 사람들이 떠올라서 그런 듯하다. 가끔 분주하고 두서가 없는 현대인의 삶의 방식이 마음을 쉬지 못하게 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왜 마음을 편히 쉬지 못하게 할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아마도 그건 욕심 때문인 듯하다. 우리는 항상 노력한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원한다. 그래서 여유가 없이 우리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올리려고 애쓴다. 남들 보기에 아무 근심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실상을 들여다보면 힘들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그래서 그 글자를 보자 마음 한 켠에서 숨이 쉬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보이는 현실에만 매몰되어 있는 요즘, 특히 아무도 모르고 우리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미세한 마음, 그 마음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그것은 염송을 통하여 지극한 참회를 통해서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것이 힘들 때 기독교처럼 하나님이 다 해준다는 무조건 믿으라는 말이 편안하고 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완전한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심언행(心言行)의 일치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어 천국을 간들 그 또한 윤회의 틀 속에 있다. 즉, 윤회하면서 받는 고통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되어있는 모든 식(識)을 부처님의 의식(意識)인 청정무구식(淸淨無垢識)으로 변하게 만들 때, 악업이 녹고 그다음은 선도 악도 아닌 열반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 그 첫 단계가 바로 자신의 마음 흐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단순히 마음을 보는 것도 힘들다. 그러나 그 마음의 드러남이 당체법문이기에 진언행자라면 내가 체험하고 있는 모든 일을 법신불의 설법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삼밀행자는 당체설법을 통하여 능히 좋은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 지혜로운 해결 방법이 나오는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옛말이 되었다. 분 단위, 초 단위로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AI의 등장과 발전은 우리 인류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다. 그럴수록 변함없는 근본적인 것에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아무리 혼잡한 세상이라도 그 근본은 마음이다. 각자 마음 하나 잘 다스리면 세상이 조용하다. 바쁜 세상과 내가 균형을 잘 잡기 위해서라도 휴심(休心)이 필요하다.
승수지 전수/항수심인당
